박중훈 영화배우
삶의 창
전 지난 2001년, 영화 <양들의 침묵>으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조너선 데미 감독의 메이저 할리우드 영화, <찰리의 진실>(The Truth About Charlie)에 주요 배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총 6개월의 촬영기간에 제작비가 1000억원쯤 되는 이 영화의 촬영지는 프랑스 파리였습니다. 영화 제작사인 유니버설 픽처스에서는 저를 파리로 부르기 위해 서울 저희 집으로 리무진을 보내 공항까지 가게 했고, 저와 매니저에게 일등석 항공권을 제공했습니다. 파리에 머무는 6개월 동안엔 에펠탑 근처 16구의 100평도 넘어 보이는 최고급 아파트에 머무르게 해주었고 운전사가 딸린 고급 자동차를 쓰게 해주었는가 하면 촬영장에선 제 전용 휴식 트레일러를 마련해 주었고, 전담 스턴트맨과 대역배우가 액션 장면 촬영 시 혹시 모를 위험을 미리 점검하는 등 저를 극진히 대우해 줬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배우의 정신적 육체적 컨디션을 최상으로 끌어올려 카메라 앞에서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게 하려는 할리우드의 전형적인 배우 용인술입니다. 그런 줄 알았지만 그래도 그 상황에 닥친 저는 마치 황제가 된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충무로도 할리우드의 물량만큼은 아니지만 연기를 뽑아내기 위해 배우를 잘 대우해 주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촬영장엔 자기 이름이 새겨진 의자가 늘 놓여 있고 식사나 숙소를 정할 때도 항상 배우의 컨디션을 먼저 고려해 주는 등 제작진의 배려를 받습니다. 촬영도 배우 중심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인기배우가 길을 걸어가면 사람들은 그 배우를 쳐다봅니다. 물론 팬이라 반가운 마음으로 보는 이도 있겠지만 사람들은 그저 유명한 사람이 내 눈앞에 있으니 힐끔 보게 되는 것일 뿐입니다. 잠깐 봐 주는 것이지만 바라봄을 당하는 배우 처지에선 그 잠깐이 계속 연결되면서 마치 세상 사람들이 늘 자기만 보는 것 같은 기분을 가집니다. 사람들은 그 배우에게 관심이 없거나 호감을 갖고 있지 않을 때는 표현을 안 합니다. 굳이 본인에게 가서 당신에게 호감이 없다고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좋아하는 경우에만 좋아한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다보니 주위에서 들을 수 있는 말은 모두 자기를 좋아한다는 말뿐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자기를 좋아한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밤에 집에 있을 때 가끔 느닷없이 지인이 전화를 해서는 술자리인데 일행을 바꿔줄 테니 통화 한번 해 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동창들과 같이 술을 마시는데 또 갑자기 어디론가 전화를 해서 모르는 사람과 통화하게 합니다. 인기배우와의 관계를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와 대화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하게 되어 우쭐해지기 십상입니다.
인기배우가 되면 영화계에선 필요해서 잘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필요에 의해서 잘해주는 건데 자기의 인간관계가 원만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전 과분하게도 많은 인기를 받으며 지내왔지만 그래도 잘 들여다보면 인기의 냉탕과 온탕을 지독히도 경험하며 지냈습니다. 인기에 눈이 가려 마치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오만한 착각에 빠져 지내기도 했지만 격동하는 인기의 속성을 긴 시간을 통해 알게 되면서 감사히도 지나간 날에 대해 부끄러움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인기인은 자기가 갖고 있는 인기로 모아진 호의와 환대가 자기의 품성과 매력 때문이라 착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건 아마 권력자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단지 권력에서 나오는 힘과 권위, 또는 필요에 의해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을 마치 자기의 인품이 훌륭하고 인간적 매력이 넘쳐서라고 착각하는 건 아닐까요? 권력을 바라보면서 느낀 점은 어쩜 그리도 인기와 권력은 닮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권력자들은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권력이 없어진 뒤 자기 탓을 깨닫지 못하고 인생무상이요, 세상 인심이 야박하다고 푸념하는 모습이 가엾다는 생각도 듭니다. 박중훈. 트위터 @moviej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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