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현호 논설위원
5년 전 신문을 들춰본다. 지금과 비슷한 일이 많다. 2005년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국가정보원의 불법 도·감청이 뜨거운 쟁점이었다. 지금 국정원도 여당 의원 사찰 논란에 휩싸여 있다. 5년 전 이맘때는 이광재 열린우리당 의원이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지닌 정권 실세로 지목됐다. 지금은 박영준 지식경제부 차관이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딸을 외교부 5급 계약직 공무원으로 특채한 일로 사퇴한 것처럼, 5년 전 강동석 건설교통부 장관도 인사청탁을 통해 아들이 5급 지방계약직 공무원으로 채용된 사실이 드러나 물러났다. 그해 11월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아펙) 정상회의가, 올해 11월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열린다. 5년을 사이에 둔 권력 주변의 풍경은 놀랄 만큼 닮았다.
무엇보다 비슷한 점은 집권 여당의 ‘반란’이다. 2005년 10월 국회의원 재선거 참패 뒤 열린우리당에선 험한 말이 거침없이 나왔다. 대통령을 두고 ‘오만’ ‘독주’라는 비판이 쏟아졌고, 대통령은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의원도 있었다. 대통령은 동네북이었다.
지금의 한나라당은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얼마 전보다는 훨씬 직접적이다. 총리·장관 후보자들의 사퇴를 두고선, 대통령을 탓할 순 없으니 인사검증 실무자들이 물러나야 한다고 말한다. 말만 바꾼 대통령 책임론이다. 정태근 의원은 ‘형님권력’이라는 이상득 의원이 불법사찰의 배후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대통령과 ‘형님’이 한 몸처럼 여겨지는 권력구도에선 ‘역린’을 건드린 셈이다. 청와대에서 반발 목소리가 나오자 정두언 의원은 “차지철이 다시 살아왔다”고 맞받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호실장으로 권력을 전횡하다 비명에 죽은 그처럼 되고 싶으냐는 말로 들린다. 의원총회나 최고위원회도 대통령의 뜻을 헤아려 입조심을 하던 집권 전반기의 모습은 이미 아니다. 친이계 예비 대선주자들은 대통령과 엇박자를 놓기 시작했다. 모두 대통령 임기 반환점을 앞뒤로 해서 벌어진 일이다. 5년제 대통령의 권력 사이클은 이미 자연법칙으로 굳어진 듯하다.
어떻게 포장하든 이는 정치생명을 건 일대 싸움이다. 그 결과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아직은 강과 약이 분명하지만 양상이 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수 있다. 그리되면 싸움을 지켜보는 이들, 예컨대 검찰과 언론부터 표변할 수 있다. 그런 전례도 있다. 본격적인 레임덕은 그때부터다.
청와대도 상황을 모르진 않을 터이다. ‘공정한 사회’도 위기감의 반영일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공정사회를 앞세워 대대적 사정과 공직기강 잡기에 나선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그렇게 해서 권력의 추가 급하게 기울어지는 것을 막겠다는 계산도 했음 직하다. 그러잖아도 이 대통령은 전임자와 달리 권력을 쉽게 내려놓거나 나누려 하지 않았다. 그런 방향이라면 정권 안이든 밖이든 정면돌파하겠다는 강경책이다. 충돌과 갈등은 더 심해질 수 있다.
청와대 다짐대로 ‘공정한 사회’가 정책·제도·인사를 통해 구현될 집권 후반기의 기준과 원칙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애초 이 대통령에겐 전임자들과 같은 열정적 지지층은 없었다. 시대를 이끌어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탓이 크겠다. 그런 그가 이왕 공정사회라는 화두를 들고 나섰다면, 정치적 수사로 끝낼 게 아니다. 공정이 절차적 정의, 도덕성, 사회적 약자 배려 등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라면 그에겐 바꿀 것이 무척 많다. 개발주의, 실적주의, 부자감세, 정실인사 등이 바로 그렇다. 유력 언론의 도움과 환심을 사려 방송 따위 이권을 입막음용으로 안겨주지 않는 것도 그에 해당할 것이다. 대통령 말대로 기득권층이 힘들어하고 반발할 일들이다. 아울러 그렇게만 된다면 많은 이들이 박수를 보낼 일이기도 하다. 사실, 그런 것이야말로 집권 후반기 내리막으로 걸어들어갈 그를 지켜줄 진짜 힘이 될 수 있다. 과연 그리할 수 있을까?
여현호 논설위원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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