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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매일 아침 회화나무와 10분 / 박어진

등록 2010-09-24 21:40

박어진 서울셀렉션 기획실장
박어진 서울셀렉션 기획실장
아침 출근 전, 근처에 있는 정독도서관으로 회화나무를 만나러 간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10분씩, 회화나무와 이야기하는 게 주요 일과다. 8월 들어 회화나무는 꽃을 피웠다. 고요히 아무렇지도 않은 듯 꽃을 피워냈다. 우윳빛과 연둣빛을 섞은 듯한 꽃잎이 바람에 살랑인다. 향기는 고요하다. “어머나, 드디어 해내셨네요. 정말 장하십니다.” 칭찬에 감탄을 섞은 호들갑으로 회화나무에게 말을 건넨다. 그는 말이 없다. 아침 햇빛은 나뭇잎 사이로 반짝인다. 회화나무의 나이는 300살, 키는 11m, 허리둘레는 3.6m이다.

올봄에 나는 초조했다. 정독도서관 뜰에 있는 단풍나무, 벚나무와 감나무들에 모두 잎이 나오고 줄기에까지 엷은 녹색이 감돌았지만 회화나무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혹시 겨울을 나느라 너무 힘들었던 건 아닐까? 설마 겨울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겠지. 혼자 회화나무 옆을 서성이며 나는 “회화나무님, 안녕하신 거죠?” 소리 내어 물어보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회화나무의 몸통 속은 여기저기 뭉텅 비워진 채 다른 물질로 채워져 있다. 그뿐 아니라 나무를 지탱하기 위해 세워진 여섯개의 받침대는 사방에서 회화나무를 꼼짝 못하게 고정시키고 있다. 심하게 말하자면 거의 만신창이가 된 노구를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5월이 돼서야 회화나무는 연둣빛 새잎을 내밀기 시작했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6월 회화나무는 잎으로 뒤덮이고 나는 아침마다 문안 인사를 다녔다. 나이 든 회화나무가 땅속에서 물을 끌어올려 잎을 피워내는 건 당연히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불평 없이 해냈다. 이제 어린 나뭇잎들은 아침 바람결에 재잘대고 회화나무는 의젓하게 그들을 바라본다.

그는 온화하고 기품이 있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든 태연하게 존재하는 이가 지닌 위엄이다. 나는 회화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그를 쳐다보며 빙그레 웃어준다. 나무가 고결한 기품을 지닌 존재임을 이제야 알게 되다니.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이 나무에게도 각각의 품격이 있다는 걸 왜 몰랐을까?

만 55년을 살아온 내게 까마득한 대선배, 300살 회화나무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것 같다. 혼자 꽃피고 혼자 열매 맺는 일, 태연하게 새잎을 내고 단풍진 후 거둬들이는 일, 그것이 나무답게 사는 길이라고 회화나무는 말한다. “세상이 너를 바라봐주지 않아도 외로워하지 마. 그냥 네가 해야 할 일을, 웃는 얼굴로 해봐. 우리 나무들처럼.” 회화나무의 메시지가 들린다. 그래, 맞아. 뭔가 끊임없이 부족한 것 같은 느낌, 뭔가 더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바로 우리들의 감옥이다.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내가 온전하고 완전하다고 느끼면 될 일이다. 남과 비교해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지 말라고. 지금 이대로 꽃을 피우라고, 회화나무는 말없이 말해준다. 그것이 우주에 하나밖에 없는 나와 우리의 생명이 존엄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말이다.

오늘도 회화나무엔 동네 참새들과 까치들이 모여든다. 마실 나온 동네 어른들은 벤치에 드러눕기도 한다. 도서관 열공족인 취업준비생들과 재수생들도 고단한 하루 중 짬을 내어 나무그늘 밑 벤치를 찾는다. 누군가는 울고 싶어 그 모퉁이 벤치를 찾기도 했을 것이다. 눈두덩이 부어오를 때까지 울고 코를 팅팅 풀다 회화나무를 올려다보며 씩 웃기도 했을 것 같다. 그때쯤 막힌 가슴이 뻥 뚫렸을까? 그는 다시 일상 속 자신의 배역으로 돌아갈 것이다.

“회화나무님, 지금 여기 계셔주셔서 고맙습니다. 회화나무님이 계셔서 우리 동네가 더 살기 좋은 곳이 되었어요. 오늘 하루도 기쁘게 살겠습니다.” 서1-7이란 고유번호까지 붙여진 보호수인 회화나무가 온 동네를 품에 안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그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 동네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박어진 서울셀렉션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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