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한겨레프리즘] 공정사회와 말의 타락 / 고명섭

등록 2010-09-28 18:49

고명섭 책·지성팀장
고명섭 책·지성팀장
나라 바깥을 떠돌다 기원전 387년 고향으로 돌아온 플라톤은 아테네 근교 아카데모스 숲속에 학교를 세웠다. 아카데미아라고 불리게 될 이 철학학교 입구에 “기하학을 모르는 자, 이 문을 들어서지 말라”고 써붙였을 때, 플라톤의 마음속에 사유의 변혁을 일으키겠다는 야심이 타올랐음이 틀림없다. 왜 기하학이었을까. 그 몇 해 전 지중해 여행 중 이탈리아 남부 타렌툼에 다다른 플라톤은 그곳에서 세력을 떨치던 수학자 피타고라스 후예들을 만나 깊이 사귀었다. 인간적 교분만 쌓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지식도 전수받았다. 수학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그 세계의 아름다운 질서에 감동했다.

기하학 원리상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언제나 180도이다. 타렌툼에서 계산하든 아테네에서 계산하든 값은 동일하다. 어린아이가 계산하든 백발의 노인이 계산하든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의 삼각형은 어떤가. 아무리 반듯한 각도기로 재도 내각의 합이 정확히 180도가 되는 삼각형은 찾을 수 없다. 우리 주위의 삼각형은 어느 것도 기하학 원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완전한 삼각형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기하학의 원리가 보증하는 그 완전한 삼각형에서 플라톤은 ‘이데아’를 발견했다. 현실의 삼각형은 그 이데아를 모방한 어설픈 복제물일 뿐이다. 이 생각을 좀더 밀고 나가면 아름다움의 이데아, 선의 이데아, 올바름의 이데아도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미인도 어딘가 약점과 빈곳이 있다. 참된 아름다움은 현실 너머 이데아로 존재한다.

플라톤은 이 생각으로 당대 아테네를 둘러보았다. 가짜들이 진짜 행세를 하고 다니는 곳, 말이 타락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어려운 곳이 아테네였다. 플라톤이 보기에 말의 혼란과 타락의 주범은 소피스트들이었다. 민주주의 시대가 열어놓은 정치판에서 말로써 사람들을 낚는 기술을 가르치는 자들이 소피스트들이었다. 이들은 진리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말싸움에서 승리하는 법을 가르쳤다. 이기는 것이 목표이므로 기만이 됐든 사술이 됐든 효과 있는 기술만 구사하면 된다. 말이 진실에서 멀어지고, 언어가 타락한다. 세상이 어지러워진다. 어떻게 하면 이 타락에서 언어를 구할 수 있을까. 내각의 합이 정확히 180도인 참된 삼각형이 있듯이, 언어의 세계에도 진짜와 가짜를 가를 객관적 척도가 있을 것이다. 이데아가 바로 그 척도다. 플라톤은 이 이데아로써 언어를 바로 세우고 세상을 바로 세울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플라톤이 타렌툼에서 기하학을 배우기 꼭 100년 전 공자는 위나라로 가는 길목에서 제자 자로와 정치에 관해 문답했다. 자로가 물었다. “위나라 군주가 선생님을 모셔다가 정치를 하려 한다면 무엇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이름을 바로잡을 것이다.” 왜 ‘정명’(正名)인가.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바른 논리를 따르지 않고, 말이 바른 논리를 따르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집권세력의 캐치프레이즈가 된 ‘공정사회’를 플라톤이나 공자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공정사회의 기초는 공정 경쟁에 있다. 공정 경쟁은 공정한 교육 없이 성립할 수 없다. 이 정부의 교육정책은 ‘부잣집 아이들 좋은 대학 보내기’ 운동이나 다를 바 없다. 평준화는 무너졌고 특수목적고는 귀족학교가 됐다. 사교육비는 치솟는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야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런 반교육적 교육구조의 견고화를 국가 정책으로 밀어붙이면서, 그런 사정은 놔둔 채 공정사회를 외치는 것이야말로 공정이라는 말을 썩히고 죽이는 짓이다. 말이 살아야 한다.

고명섭 책·지성팀장michael@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