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영 소설가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내게 늘 남녀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진다. 영화 속 남녀의 성격과 대사와 웃지도 울지도 못할 상황을 곱씹다 보면 통쾌하면서도 낯부끄럽다. 영화를 보고 난 뒤 혼자 실실 쪼개는 그 시간들이 너무 값져서 영화가 얼른 끝나길 바란 적도 있다. 엔딩과 동시에 내 머릿속에서 진행될 구차하고 지질하지만 나름 진지한 상상들이 출발신호가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독서는 책장을 덮고 나서 시작된다. 좋은 영화 역시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영화는 오랫동안 질리지 않고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좋은 영화다.
그런데 최근 개봉한 <옥희의 영화>를 본 뒤에는 남녀관계에 대해 생각할 틈이 없었다. 뒤섞이고 헝클어진 시공간과 인물 때문에 머릿속이 우글거렸다. 감독이 던져준 소스만으로 이야기를 조립해야 했고, 시간의 순서를 정해야 했으며, 그 순서와 이야기에 따라 인물을 다시 설정해야 했다. 머릿속에서 재탄생할 무수한 <옥희의 영화>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이전에 맛보지 못한 색다른 감흥으로 잠시 멍청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마냥 즐거워할 수만은 없었다. 상상을 가로막는 두 가지 잡념 때문에 상상의 달리기는 자꾸 멈췄다.
송 교수는 진짜 돈을 받았을까. 진구는 정말 제자를 폐인으로 만들었나. 작품 감상에는 전혀 문제될 것 없는 장면이지만, 그 장면에서 드러난 소문과 진실의 관계가 나를 불편하게 했다. 송 교수가 돈을 받았다는 말이 퍼지는 순간, 누군가가 진구에게 ‘당신 때문에 내 친구가 폐인이 되었다’고 말하는 순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진실은 이미 완성된다.
의심과 소문과 진실의 트라이앵글에서 소리를 내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진실은 언제나 말이 없다. 말한다고 한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소문에 의한 피해자가 다수에 대한 가해자로 뒤바뀌는 것도 순식간이다. 소문과 의심에 중독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끊임없이 변주되는 또다른 소문이다. 진실은 드러나지 않아도 좋다. 그쯤이야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은 소문 후의 시간을 상상하느라 나는 영화 속 시간을 재조립할 수도, 사건을 재해석할 수도, 인물을 재탄생시킬 수도 없었다. 현실이었다면 송 교수와 진구는 온갖 험담과 욕설에 시달리고 증식되는 소문을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송 교수가 명확하게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았거나 진구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기 때문이 아니다. 대중에게 그들의 대답은 중요하지 않다.
지금 이 순간에도 기사는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사람들은 클릭 몇 번으로 개인의 사생활까지 꿰뚫어본다. 그 혹은 그녀에 대한 말들이 다만 소문일 뿐 사실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많은 이들이 그 기사를 읽고 이슈가 되어 또다른 진실을 가렸다면 그것으로 소문은 제구실을 다한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이야기한 뒤 ‘하하하’ 웃고 말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불행히도 우리는 그런 식으로 많은 사람을 다른 세상으로 보내버렸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 대중이 원하는 것은 진실이 아닌 증세와 반응이다. 언론 역시 마찬가지다. 진실만으로는 사건을 진척시킬 수 없고, 더 많은 담론을 만들어낼 수 없다. 진실의 자리가 원래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없애버렸다. 없애놓고,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고 손가락질한다. 소문의 주인공이 사라졌다고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곧 또다른 주인공이 등장할 것이다. 언론과 대중이 금세 만들어낼 것이다.
최진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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