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성 산업팀장
날씨가 부쩍 쌀쌀해졌다. 이맘때면, 으레 각 방송사들은 간판급 드라마를 교체하기 마련이다. 때마침 지난 2개월간 날마다 ‘방영’되던 드라마도 지난달 말 막을 내렸다. 드라마의 공식 이름은 ‘상생’이었건만, 일부에선 ‘대기업 때리기’란 별칭으로 바꿔 부르기도 했다. 현직 대통령과 그 주변의 핵심 측근들이 주요 출연진으로 몸소 등장했고, 대기업 총수들에게도 꽤나 비중 있는 배역이 맡겨졌다. 마지막 장면은 지난달 29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민경제대책회의’였다. 한 편의 공익성 드라마로 보이길 바랐던 게 제작 의도였을 터인데, 간판급 인물이 수두룩한 이번 대하드라마는 사실상 실패작으로 끝난 게 분명하다.
상생. 누가 뭐래도, 2010년 우리 경제에서 적어도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고선 감히 입에 올릴 수 없는 금칙어다. 공정한 거래질서를 세우는 게 그 하나요, 대-중소기업을 아우르는 산업 생태계를 혁신하는 일이 다른 하나다. 따지고 보면, 상생이란 다음의 두 방정식을 풀 해법을 찾는 일일 게다. 납품단가=F(원자재가격)와 최종생산물가격=G(납품단가, X, Y).
두번째 방정식부터 보자. 최종생산물을 시장에 내놓는 대기업이 받는 물품가격은 통상 납품단가 이외에도 여러 요인들(X, Y 등의 변수)에 영향을 받는다. 이런 구조 아래서, 예컨대 대기업이 거둔 이익률이 시장 평균치를 웃돈다면, 그 초과분이 대기업 주머니로만 흘러들도록 놔둬서는 안 된다. 그 초과분은 해당 업종에 포함된 대-중소기업 모두의 ‘공동산물’이므로, 그 과실 역시 ‘사회연대기금’이나 ‘업종발전기금’ 등의 형태로 모두가 누리는 게 상생이란 이름값에 걸맞은 일이다. 첫번째 방정식은 훨씬 간단하다. 중소기업 처지에서 원자재가격은 납품단가를 좌우할 핵심 변수일 수밖에 없다. 중소기업한테 납품단가 조정 집단교섭권조차 주지 않는 한 상생은 그 문턱에조차 들어서기 힘들다.
‘제도’보다는 ‘문화’가 중요하다는, 드라마 속 이명박 대통령의 명대사에서, 혹여 팔꿈치로 툭 치듯 부드러운 자극만으로 커다란 행동변화를 불러일으킨다는 ‘너지’(nudge)를 깊이 염두에 둔 게 아니냐는 생각마저 들었다.(이명박 대통령은 지난해 여름휴가철을 맞아 화제작 <넛지>를 적극 추천한 바 있다.) 일개 행정관이 무시로 민간기업의 고위 임원들을 불러 호통치고 인사마저 쥐락펴락하는 정권에서, ‘너지’란 게 어울릴 법이나 한 소리이겠냐마는, 그동안 ‘수조원을 벌어들이는 삼성전자에 배 아프다’며 노골적으로 대기업과 맞짱떴던 측근 인사들은 무안함으로 얼굴이 벌게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작 상생 드라마가 변죽만 요란하게 울린 실패작으로 끝난 진짜 이유는, 시장경제를 훼손해선 안 된다는 억지 논리를 끌어다댔다는 데 있다. 정부란 설령 시장이 원활하게 작동하더라도 ‘2% 부족한 것’을 메우기 위해 언제라도 등판해야 할 ‘구원투수’, 곧 ‘시장보완자’이기도 하지만, 애초 공정한 거래조차 이뤄지지 않아 시장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을 때는 시장을 만들어줘야 하는 ‘시장형성자’의 짐도 져야 한다. 시장경제란 이런 부지런한 정부를 거름 삼아야만 쑥쑥 자라나는 나무다.
올해 여름을 달군 상생 드라마는, 시장경제에 대한 제대로 된 경험도 학습도 심지어 고민도 없는 사람들이, 시장경제를 해치지 않겠다는 엉터리 명분을 내세워 정작 시장경제를 죽이는 썰렁한 코미디로 끝나버렸다. 상생은 허무하게 끝났고. 간만에 귀한 거름을 맛볼 수 있던 이 땅의 시장경제도 덩달아 시들어갈지도 모를 운명이다. 물론, 정부의 ‘의중’을 캐내느라 잠시 엎드렸던 대기업들이야 뒤돌아서 환하게 웃고 있겠지만.
최우성 산업팀장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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