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인 노매드 미디어& 트래블 대표
삼개월 주기로 찾아오는 역마병을 용케 버티다 일년 만에 짧은 주말여행을 떠났다. 일찌감치 출국절차를 마치고 공항 게이트 앞 의자에 앉아 책을 펼친다. 공항의 풍경은 부두의 그것을 닮았다. 고기를 잡으러 떠나는 출항선의 생명력과 작업을 마치고 돌아온 하역장의 고단함은 공항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새벽 여섯시 반 무렵의 신선한 공기와 소풍을 앞둔 소년의 설렘이 넘실대는 이 자리, 이 시간이 언제나 좋았다. 귀국행 공항의 솜처럼 지쳐 가라앉은 분위기와는 완전히 대조되는 분위기다. 특히 통유리 창을 통해 활주로 위에 대기중인 거대한 항공기를 바라보며 몇 시간 후 내가 닿을 미지의 세계와, 여행길에서 만날 사람들을 떠올리면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는 모든 것이 무덤덤했다. 백년을 같은 자리에서 권태를 팔아 온 노인처럼 공항의 느낌도, 앞으로 펼쳐질 여행에의 기대감도 모두 일상처럼 싱겁고 밍밍하게 다가왔다. 웬만한 나라는 다 다녀보니 사람 살아가는 모습은 다 비슷한 것이며, 사람도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내 의식의 바닥을 내리깔고 있었다. 어쩌다 헛도사가 돼버린 스스로를 착잡해하면서, 트위터에 이런 문구를 올렸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여행 많이 하란 말을 체력의 의미로만 해석했다. 공항에 앉아 비행기를 봐도 설렘이 안 생기는 걸 경고한 것이었음을 문득 깨닫는다. 어디에도 미지의 세계가 없다고 느끼는 건, 어쨌건 우울한 일이다.”
그러고 보면 얼마 전부터 미아리 애기보살을 자꾸 흉내 내고 있었다. 누군가를 처음 봤을 때, 보이지 않는 돗자리를 하나 깔아놓고 그 위에 앉아 선입견의 부채를 펼쳐든다. 인상과 목소리 등의 외모로 그 사람의 성격을 판단해 버린다. ‘이전에도 이런 스타일은 나와 맞지 않았어’ 따위의 집단분류법이 돗자리 위에서 신춤을 춘다. 신기하게도 이런 방식이 비교적 맞아떨어질 때면, 자신의 직관력을 뿌듯해하기도 한다. 사람 보는 눈이 노련해졌다고 흐뭇해한다. 혈액형으로 지구인의 성격 분류를 해놓고 그것이 딱딱 맞는다고 신기해하는 초등학생 아들 녀석과 도찐개찐이다.
오히려 몇년 전까지는 친구들에게 지청구를 자주 들었다. 뭐가 그리 궁금한 것이 많아서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느냐고, 그놈의 질문병 좀 고치라고 친구들은 나를 타박했다. 실제로 나는 다른 사람의 살아온 나날과 삶의 방식과 꿈 등이 궁금했다. 누구나 어차피 한 번의 삶을 살아갈 텐데, 나 아닌 누군가의 삶을 관심 있게 바라보는 것은, 마치 소설책을 읽는 것처럼 또 하나의 다른 삶을 살아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그들은 (비록 나와 다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하나의 거대한 우주였다. 한 명 한 명이 개별적으로 반짝이는 별이었다. 여행지에서도 내 감동의 중심은 늘 사람이었다.
더 이상 사람에게 관심이 많지 않아졌을 때, 늙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늙음이 겁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새로울 것 없는 내일이 두려웠다. 세상을 도사연(道士然)하게 바라보는 자세가 이 노화를 부채질한다고 진단했다. 방법은 자세를 교정하는 것뿐이다. 개봉 영화를 만나는 설렘으로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할 것, 보물찾기를 하는 호기심으로 익숙한 사람을 새롭게 볼 것, 그리고 사람과 사람의 ‘거기서 거기’까지의 거리가, 내 상식과 지식과 경험과 예측을 훨씬 넘어서는 폭이라는 것을 늘 최면 걸 것, 이라고 나는 여행 내내 주문 걸고 다녔다. 윤용인 노매드 미디어& 트래블 대표 트위터@ddub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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