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순 대기자
수백 미터의 지하 갱도에 갇혔던 광원들이 69일 만에 극적으로 구출된 칠레의 한 광산 사건은 수많은 영웅들을 만들어냈다. 절망적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버텨낸 광원들과 구조 전문가들의 모습을 보면 영웅이란 말이 남발된다는 위화감이 그다지 들지 않는다. 광원들이 캡슐을 타고 지상으로 나오는 광경은 전세계로 중계됐다. 대부호인 세바스티안 피녜라 칠레 대통령은 영상의 위력을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다. 티브이 방송사를 직접 운영했던 그는 구출 현장에서 영상카메라의 배치 방식까지 개입했다고 한다. 광원들이 재난과 피로에 짓눌린 모습이 아니라 밝고 쾌활하게 보이도록 세세하게 신경을 썼다.
그래서인지 광산의 위험한 작업 환경, 안전규정 무시, 광원들의 실제 삶은 별로 드러나지 않고 칠레 정부의 치밀한 구조작업 진행, 칠레인들이 빈틈없는 일 처리 방식이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칠레인의 엄격한 약속 준수 의식과 작업 방식은 마치 영국인의 태도를 연상시킨다는 외신 보도도 있었다. 예전에는 독일계 이민이 많고 프로이센식 군대 기풍이 유지돼 전통적으로 육군 강국으로 알려지던 나라다. 피녜라 대통령의 홍보 수법이 칠레의 대외적 이미지를 좋게 고양시키는 데 일조했다.
나에게는 광원들이 지하 갱도에 국기를 걸어놓고 ‘치치치 레레레’ 하는 응원구호를 외치는 모습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정말 시대가 바뀌었구나 하는 느낌이 절로 들었다. 나의 머릿속에 남아 있던 칠레의 인상과 달라도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24년 전 미국에서 만났던 한 칠레 기자의 이름을 아직 기억한다. 그 여성의 이름은 이레네 헬름케, 독일식 이름이었다. 각국에서 모인 기자들이 반년 동안 공동연수를 하는 모임에서 만났다. 일행들은 그를 영어식 발음으로 아이린이라고 부르곤 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은 별다른 친분관계가 있어서가 아니다. 단지 하나의 공통분모가 우리를 묶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원래 말이 많은 족속이라 일행은 시사문제를 놓고 끊임없이 논쟁을 벌였다. 그와 나의 모국은 당시 악명 높은 군사독재 아래 있었기 때문에 화제가 그쪽으로 흐르면 결코 좋은 얘기가 나오지 않았다. 그럴 때 이레네와 나는 동병상련의 처지가 됐다.
당시 칠레의 이미지는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이 만든 영화 <미싱>(실종)에 담겨진 그대로였다. 군인들의 무차별 발포, 고문,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의 으깨진 손 등이 연상되는 참혹한 영화다. 이 영화는 1982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 대상과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다음해 보수적인 아카데미영화제에서는 강렬한 정치적 색채임에도 불구하고 각본상을 받았다. 아마도 73년 칠레 쿠데타에서 희생된 미국인을 다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국도 88 서울올림픽이 치러지기 전이라 광주 학살의 잔상이 강력하게 남았던 시절이다.
그래도 무심한 세월이 마냥 흘러가는 듯하더니 두 나라 모두 암흑이 걷히고 희망의 햇살이 비치는 세상이 됐다. 한국에서는 6·10 민주대항쟁의 결과 쿠데타의 주역들을 법정에 세웠다. 광주학살의 주역 전두환이 다시 거리를 활보하고, 그를 전직 대통령으로 융숭하게 대접하는 정신 나간 무리들이 여전히 이 땅에 남아 있지만 그래도 한 시대를 정리하고 갔다. 칠레는 쿠데타의 주역 피노체트가 권좌에서 물러난 뒤에도 오랜 기간 스스로의 힘으로 단죄하지 못했다. 영국을 방문했던 피노체트가 스페인 판사의 요청으로 한동안 현지 구속됐을 때도 정작 칠레인들은 별다른 조처를 취하지 못했다. 하지만 민주화가 착실하게 진행돼 쿠데타로 희생된 인사의 딸이 대통령에 선출돼 무난하게 임기를 마치고 지난 3월 퇴임했다.
칠레와 한국은 한고비를 넘어섰다고 할 수 있겠지만, 갈 길은 우리가 훨씬 먼 것 같다. 무엇보다도 분단의 족쇄가 조금도 느슨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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