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준현 사회부문 선임기자
1. 나는 대학생이다. 나는 한때 새로 수입된 명품을 평가하는 ‘리뷰왕’이었다. 가방·구두 등 상품이 출시되자마자 사들여 ‘세일즈 프로모션’이라는 사이트에 사용 후기를 올렸다. 상품평 리뷰는 짭짤한 금전적 보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돈으로 수입명품을 계속 구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리뷰를 쓰고 나면,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붙여 잽싸게 상품을 반품했다. 그때부터 나는 ‘반품왕’이 됐다. 신예작가 은규의 소설 <반품왕> 연작에 나오는 주인공 이야기다.
그러던 ‘나’는 어느날 ‘강적’인 판매자에게 반품을 거부당한다. 쓸모없는 명품 가방 3개와 수백만원의 카드빚이 고스란히 남았다. ‘나’는 알바로 나설 수밖에 없다.
‘나’의 아버지는 가구를 판다. 어느날 방송판매한 물품이 무더기로 반품된다. 다른 회사에서 비슷한 제품을 반값에 내다 팔았기 때문인데, 자금난에 시달리던 아버지는 곧 문을 닫기 직전이다. 반품하고 반품받는 그 두 사례의 동시적 피해자는 엄마다. 엄마는 최저생계비를 조금 넘는 시급을 받으며 대형 할인마트에서 계산원 일을 할 수밖에 없다.
2. 내가 어릴 때 살던 고향집 앞에는 작은 구멍가게가 있었다. 어린 눈에 ‘철이 엄마’의 가게는 없는 게 없는 ‘꿈의 궁전’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내가 처음으로 시장경제와 만난 곳. 10원짜리 동전이 등가의 크림빵이라는 교환가치를 배우고, 20원을 내면 5원을 거스름돈으로 받는다는 기초적 셈법도 그곳에서 익혔다. 동네 구멍가게는 구구단도 외기 전인 코흘리개들에게 시장경제를 가르치던 자본주의 사회의 예비학교였다. 요즘 아이들에게 소비행위는 대형 할인매장에서 카드를 긁는 행위쯤으로 신비화된다.
‘철이 엄마들’은 요즘으로 치자면 동네슈퍼 주인이다. 요즘 대기업들이 영세상인들의 밥줄인 동네 슈퍼마켓 시장을 침범하면서 ‘철이 엄마’들도 하나둘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있다. 이미 대형 할인매장들이 들어서면서 피해를 볼 대로 본 터였다. 일터를 잃은 ‘철이 엄마’와 ‘철이’도 대형 할인매장이나 기업형 슈퍼에서 일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3. 금요일 저녁부터 가족의 주말 나들이 장소는 대형 할인매장이다. 젊은 세대주는 전자제품에 한눈을 팔고 아이들은 시식 코너에 정신을 뺏긴다. 대형 할인매장과 기업형 슈퍼에서는 판매원, 계산원, 파견노동자들이 일한다. 그러나 그들은 상품의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노동도, 그들의 노동을 쥐어짜는 기업들의 외주화 정책도 철저히 신비화된다.
‘반품왕’의 엄마는 대형 할인매장 계산대에서 지폐와 동전을 세고 있다. 옆에 있는 ‘철이 엄마’는 스캐너로 상품을 열심히 찍고 있다. 파견노동자 ‘철이’는 부지런히 상품을 나르고 있다.
친척이 대형 할인매장에서 계산원으로 일한 적이 있다. 그다음부터 대형 할인매장의 계산원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파견노동자들도 눈에 들어왔다. 상품의 숲에 가려 신비화됐던 그들의 노동이 보였다. 예를 들어 본다. “인터넷 쇼핑몰의 판매원인 내가 대형 할인매장의 소비자가 되어 계산원인 엄마에게 계산이 틀렸다며 항의한다. 나는 대형 할인매장 때문에 망한 자영업자인 아버지의 용돈까지 대야 한다. 파견노동자인 내 친구가 인터넷 쇼핑몰에서 옷을 산 지 일주일 만에 환불을 요구하자, 판매원인 나는 ‘반품 불가’로 맞선다.”
미국에서 월마트가 들어오면 납품값 쥐어짜기로 자영업자들이 망하고, 마침내 도시 전체가 거덜난다는 얘기가 있다. 판매원, 계산원, 파견노동자들이 일하는 할인매장을 지날 때 나는 그들에게서 ‘몰락한 자영업자의 가족사’를 목도한다. 손준현 선임기자 dust@hani.co.kr <한겨레 주요기사> ■ 한나라·민주 ‘10·27 속앓이’
■ “실업급여 적립금 2013년 고갈된다”
■ F1 진행 ‘F학점’…입장객 불만 폭발
■ 그 많던 ‘철이 엄마’는 어디 갔나요
■아파트 전기세 내고도 단전 ‘날벼락’…왜?
미국에서 월마트가 들어오면 납품값 쥐어짜기로 자영업자들이 망하고, 마침내 도시 전체가 거덜난다는 얘기가 있다. 판매원, 계산원, 파견노동자들이 일하는 할인매장을 지날 때 나는 그들에게서 ‘몰락한 자영업자의 가족사’를 목도한다. 손준현 선임기자 dust@hani.co.kr <한겨레 주요기사> ■ 한나라·민주 ‘10·27 속앓이’
■ “실업급여 적립금 2013년 고갈된다”
■ F1 진행 ‘F학점’…입장객 불만 폭발
■ 그 많던 ‘철이 엄마’는 어디 갔나요
■아파트 전기세 내고도 단전 ‘날벼락’…왜?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