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성 기자
황장엽은 탈북 뒤에도 김일성을 존경했다. 그를 남한으로 모셔온 이들이 인정하기 싫어하는 김일성의 항일투쟁 경력에 대해 그는 명백한 사실이라고 단정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독재를 구분짓기도 했다. 김일성은 너그럽고 포용력이 있는 독재자이지만, 김정일은 성격상 타고난 독재자라는 것이다. 심지어 김정일에게 권력을 세습한 것도 김일성보다는 김정일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고 엉뚱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김정일이 어릴 때부터 정치적으로 민감했고, 아버지의 권력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의 증언이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한다 할지라도, 그의 정신상태는,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가족 로맨스’에 빠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가족 로맨스란 자기 조상의 과거 행적이나 사회적 지위를 과장해서 이야기하는 경향을 말한다. 황장엽은 김일성과 자신을 같은 혁명 1세대로 동일시하면서 김정일에게 모든 비극의 책임을 떠넘겼다.
그는 “주체사상이란, 사회적 운동의 주체는 인민대중이며 사회적 운동을 떠밀고 나가는 추동력도 인민대중에게 있다는 사상”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민주적인 개념이 북한 통치자들에 의해 수령절대주의로 변질했다고 비판했다. 그 과정에서 주체사상의 대부로서 자신이 어떤 구실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황장엽 비록 공개>나 <맑스주의와 인간중심철학> 같은 그의 저서와 회고록은 그가 죽는 순간까지도 주체주의자였음을 보여준다. 황씨의 영결식에 끝내 얼굴을 내밀지 않은 탈북 동지 김덕홍이 “황 전 비서가 아직도 주체사상에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비난했다는 얘기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정부와 여당은 자신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주사파’에게 서둘러 훈장을 추서하고 국립묘지에 안장한 꼴이 된다. 이를 야합이라고 보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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