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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문화칼럼] 조립소설과 서사기술자

등록 2010-11-05 19:09

이명원 문학평론가
이명원 문학평론가
황석영의 <강남몽>과 권비영의 <덕혜옹주>가 표절 논란이 되고 있다. <강남몽>의 경우 소설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조폭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이 조성식 <신동아> 기자의 저작을 표절했다는 주장이다. 사실 <강남몽>에서 가장 활력 있는 서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이 부분이라는 점에서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덕혜옹주>의 경우는 표절 문제가 국제적으로 비화한 경우인데, 일본의 사학자 혼마 야스코가 자신의 평전인 <덕혜희>를 도용했다고 <한겨레>에 자신의 견해를 기고한 뒤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소설의 표절 논란은 점입가경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1992년 제1회 작가세계문학상을 받은 이인화의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는 작고한 평론가 이성욱에 의해 표절이 지적되어 커다란 논란이 되었고, 그해의 한 일간지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역시 표절 혐의로 당선이 취소되는 초유의 사태도 있었다.

이후에도 표절 논란은 특히 소설 분야에서 많은 논란을 거듭했지만, 대개는 사실 여부가 명백히 밝혀지지 않은 채로 흐지부지되었다. 문학계에서 논리적 해결을 보지 못한 사례만 해도 박일문, 신경숙, 권지예, 조경란 등의 장·단편을 둘러싼 표절 논란이 기억난다. 표절을 둘러싼 문제의 경우 ‘논란’만 되고 문제 해결이 없는 문단의 풍토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1990년대 이후 왜 하필 소설 분야에서 표절 논란이 무성할까. 황석영이나 권비영의 표절 논란을 지켜보면서, 내가 생각한 것은 어쩌면 오늘의 일부 소설가들은 창작자라기보다는 서사기술자이며, 소설을 쓴다기보다는 조립소설을 제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었다.

사실 위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작품 말고도, 이른바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많은 수의 ‘모델소설’들은 기왕에 축적된 역사적 연구에 디테일한 내면묘사 등을 덧붙이는 형식으로 안일하게 쓰여지고 있는 작품도 상당수다. 이렇게 창작이라기보다는 자료의 재구성이나 서사적 모티프의 미끈한 조립에 시종하는 경우, 소설과 원천자료인 평전 사이의 차별성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권비영과 같은 신인은 논외로 한다고 해도, 황석영과 같은 중견작가들조차 이런 조립소설을 쓰는 일의 문제성이나 그 파장에 대해 별다른 문제의식이 없어 보인다는 점은 크게 우려스럽다. 표절 논란이 일자 해당 작품을 출간한 출판사들은 법정대리인을 내세워 표절 논란을 ‘우회’하거나, 작가가 나서서 표절 여부는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왜 그런 작가들이 창작 당시에는 그토록 경솔했는가 하는 반문에 이들은 묵묵부답이다.

이들 작가들의 말대로라면, 앞으로 등장할 후배 작가들은 얼마든지 자료와 인터넷을 종횡무진 검색하면서, 손쉽게 문제적 소설을 조립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1992년 당시 이인화는 자신의 소설이 표절은커녕 포스트모더니즘 미학의 핵심 기법인 혼성모방을 실험한 혁신적인 작품이라고 반문했던 사례가 있다. 이것은 사실상 소설이나 비평 모두의 시효 만료를 선언하는 일에 해당한다.

표절과 도용, 영향과 모방을 둘러싼 문학이론을 앞세우기 전에, 소설적 인물과 사건을 상상하고 창안하는 창조적 작가의 고된 수고 대신, 자료의 재구성이나 조립에 시종한다면 그것은 서사기술자에 불과하다. 작가는 작품을 쓰고 서사기술자는 서사물을 조립한다. 작품도 질을 따지고 상품도 기능의 우수성을 판단하지만, 창조에서 조립으로 떨어진 서사물이 짝퉁의 혐의까지 받고 있다면, 이건 소설이 아니다.


이명원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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