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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기고]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에게 / 김형완

등록 2010-11-08 20:33

김형완 전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정책과장
김형완 전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정책과장
현병철 위원장님, 저는 얼마 전 국가인권위를 자진퇴직한 직원입니다. 다섯 달만 더 채우면 20년 근속으로 공무원연금 대상자로서 노후가 보장되는 자리였지요. 식솔을 책임져야 할 제가 ‘철밥통’을 스스로 걷어찬 이유는 한마디로 “공무원이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소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면 국민의 혈세를 받아먹을 수는 없다”는 상식적인 이치에서였습니다. 결례를 무릅쓰고 고언을 드리는 것은, 지금 위원장께서 그런 상식의 궤를 너무 벗어나고 계신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세계인권선언 전문은 “사람들이 (국가권력의)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마지막 수단으로서 반란에 호소하도록 강요받지 않으려면, 인권이 법에 의한 지배에 의하여 보호되어야 함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법치주의를 통해 인권이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법치주의란, 국가 공권력이 자의적으로 인권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법에 의해 통제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연한 얘길 왜 이 귀한 지면에 새삼 되새기는 걸까요? 오늘 한국 사회에서 법치주의는 심각하게 도착(倒錯)됐기 때문입니다. 법치주의를 구성하는 기본권 보호니 적법 절차니 과잉 금지니 하는 말들도 그저 교과서에나 나오는 공허한 개념들일 뿐, 현실에서는 아무런 실효성도 없는 원칙들이 됐습니다. 국가 공권력이 법의 지배를 받는 게 아니라, 거꾸로 권력이 법치를 내세워 민주주의와 인권을 다반사로 묵살하고 있습니다. 전도도 이런 전도가 또 있을까요?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인권의 마지막 보루 구실을 해야 할 인권위마저 작동불능에 이른 것은 절망스런 일입니다.

현병철 위원장님, 최근 국가인권위가 파경을 맞고 있습니다. 상임위원들의 동반사퇴로 드러난 오늘의 위기는 예견된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용산 사건, 미네르바 사건, 박원순 변호사 사건, <문화방송> 피디수첩 사건 등등 심각한 인권사안들이 사회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데도 언제부턴가 국가인권위는 외면하여 왔습니다. 위원장께선 이런 안건들이 실무적으로 준비되고 위원회에 상정되는 것 자체를 꺼리셨지요. “사회적 논란을 가중시키는 사안은 다루지 않는 게 좋다” 또는 “생활밀착형 인권사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동안 위원장께서 내세운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정권의 뜻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인권위의 위상과 역할에 중대한 하자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가인권기구 설립에 관한 유엔 가이드라인인 파리원칙이 강조하듯이, 권력에 대한 독립성을 생명으로 여겨야 할 인권위가 앞장서서 권력 눈치보기에 나섰으니, 행여나 부여된 소임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사회의 인권 이슈 어느 것이, 현실의 살아있는 권력과 맞서서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한, 과연 어떻게 논란을 피해 갈 수 있겠습니까. 또 국민주권 발현에 직접 영향을 주는 것이자, 헌법이 정한 기본권 중의 기본권이랄 수 있는 표현의 자유나 집회시위의 자유조차 빨간 신호가 켜지고 있는 마당에 이보다 더 절박한 그 어떤 인권 이슈가 국민 생활밀착 인권이겠습니까. 중대한 인권사안에 대하여 ‘사회적 논란’(사실은 정치권력)을 우려해서 다루지 않겠다는 것은 결국 노골적인 권력 눈치보기와 다름없고, 인권 전담 기구로서 감시견의 구실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기본적인 사명조차 수행하지 못하는, 그것도 스스로 포기하는 기관에 국민들의 소중한 혈세가 소모되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국민들은 자신들의 소중한 세금이 그야말로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제 몫을 하는 인권기구와 인권 공직자에게 쓰이길 원합니다.

유감스럽게도 현재 인권위 존망의 갈림길 한가운데에 위원장께서 계십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위원장님의 결단이 필요한 때입니다. 결례를 무릅쓰고 직언을 드립니다. 물러나십시오. 공직은, 특히 국가인권위원장은 아무나 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김형완 전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정책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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