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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기고] ‘복지국가’는 없다, 있다 / 신영전

등록 2010-11-10 20:24

신영전 한양대 교수·사회의학
신영전 한양대 교수·사회의학


가을이 무르익고 이른바 학회 철이다. 정치권 못지않게 학계에서도 여기저기 ‘복지국가’ 이야기다. 한 사회에서 특정 단어의 회자는 그것의 결핍 또는 집단적 소망을 보여준다.

얼마 전 ‘한국 복지국가 담론의 지형과 과제’라는 주제로 펼쳐졌던 한 학술대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떤 이는 당위를 이유로, 어떤 이들은 역사분석을 통해 복지국가의 도래 가능성을 점치고 그 전략을 논했다. 어떤 이들은 노동세력의 위상을 포함한 정치구조의 보수성, 재정능력 등을 이유로 가능성을 일축했다.

미슈라의 말처럼 복지국가에는 적어도 세가지 치명적 약점이 있다. 첫째, 복지 전문가와 관료들의 기득권 문제이다. 둘째, 기대 상승과 자원 제한의 딜레마이다. 셋째, 사회서비스의 효율성과 비용 문제이다. 이 세가지 약점에 대한 충분한 대안을 가지고 국민을 설득할 수 없는 한 복지국가는 없다. 또한 이제 한국 사회에서 ‘복지국가’는 진보만의 단어가 아니다. 개발독재의 유산을 정치생명으로 하는 유력한 대권주자도 ‘행복한 복지’를 이야기하고, 한나라당 역시 ‘70% 복지’를 이야기한다.

‘복지국가’가 여야 모두의 언어가 되는 순간, 정치공학 면에서 이 단어의 유용성이 이미 상당부분 훼손됐다. 또 혹자는 최근 ‘복지국가’라는 단어의 회자가 1997년 경제위기 이후 심화된 삶의 불안을 주식, 펀드, 부동산 투자로 풀 수 없다는 국민적 인식의 확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도덕적 결함이 있는 줄 알면서도 “잘살아 보세”라는 마음으로 엠비(MB)에게 표를 던진 국민들이 과연 연대적 삶을 살기로 마음을 바꾼 것일까? “국민들이 깨닫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저 “당신 생각일 뿐” 아닐까?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복지국가’가 오기 어려울 것이라 ‘예측’하는 것은 관망자의 몫이지 스스로를 역사의 주체로 여기는 이들의 생각은 아니다. 나는 복지국가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이미 수없이 존재했다고 믿는다. “해 뜨면 밭에 나가 일하고/ 우물 파서 물 마시고 밭을 갈아 배불리 먹으니/ 임금의 힘이 내가 살아가는 데 무엇 때문에 필요할 것인가”(격양가)라는 노래가 넘쳐흘렀던 요순시대가 바로 복지국가 아니었던가?

그것이 먼 옛날의 신화라면, 1871년 파리는 어떤가? 야간노동의 폐지, 집세 전액 면제, 책·지도·종이 등 모든 교재의 무상지급을 이뤘던 파리코뮌은 복지국가가 아니었던가? 남의 나라 이야기라면, 독재정부 없이도 평화롭고 행복했던 1980년 5월 며칠간의 광주는 어떤가? 겨우 두 달, 겨우 며칠만 존재하면 복지국가가 아닌가? 그것이 너무 비장하다면 최근 한국 사회가 이루어낸 무상급식과 학생 체벌 금지는 어떤가?

한국 사회에서 ‘복지국가’가 정치적 수사에 머무는 순간 복지국가는 없다. 새로운 세상은 새로운 주체를 필요로 한다. 새로운 주체가 나오기 위해서는 기존의 의미를 해체하고 그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잘살고자 하는’ 이들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바꾸는 작업이 필요하다. 당연히 이러한 작업에는 ‘낡은’ 복지국가의 의미를 해체하고 재구축하는 것도 포함된다.

함석헌 선생은 “모든 싸움을 다 싸워내면 무풍지대의 유토피아가 올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역사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라는 말로 ‘종말론적 복지국가론’의 설파를 경계했다. 그렇기에 복지국가는 현재에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그 무엇이다. 그렇기에 복지국가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 밤 그 어느 곳에서 촛불 하나가 켜지면 그곳에 또 하나의 작은 복지국가가 태어났다고 믿는다. 하루의 노동에 몸은 파김치가 되었지만 몇 명의 ‘공돌이’, ‘공순이’가 함께 모여 책을 읽으며 희망을 꿈꾸었던 그 3층 다락방, 10대 여공들이 똑바로 설 수조차 없던 그 전태일의 다락방, 그 시간 그곳에서 아주 짧지만 복지국가의 불빛이 반짝였던 것처럼.

신영전 한양대 교수·사회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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