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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오만한 미국, 만만한 한국 / 정석구

등록 2010-11-15 21:03수정 2010-11-16 17:07

정석구 선임논설위원
정석구 선임논설위원
문제는 단순하다. 미국 자동차업계에 이익이 되는 쪽으로 협정문을 뜯어고치겠다는 것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주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끝난 뒤 빈손으로 한국을 떠나면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의 목표를 간단명료하게 정리했다. “미국 자동차업체들이 아무런 이익을 거두지 못하는 재협상은 의미가 없다.”

그 이유도 단순하다.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엔 40만대나 되는 한국 차가 수입되지만 한국에는 미국 자동차가 수천대밖에 수입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한국이 미국 차를 더 수입할 수 있도록 관세, 비관세 장벽 등을 낮추라는 것이다. 반면 미국에 수입되는 한국 차에 대한 관세 장벽이나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처) 등은 더 강화하겠다고 한다.

오바마 대통령 말대로 미국에 수출되는 한국 차와 한국에 수출되는 미국 차의 격차가 큰 것은 사실이다. 지난해 한국 차의 미국 수출 대수는 약 45만대다. 반면 미국 차의 국내 수입은 6000여대에 그쳤다.

그럼 그 이유가 우리의 높은 관세나 비관세 장벽 때문인가. 똑같은 조건에서 독일 차는 지난해 3만여대가 수입됐다. 일본 차도 지난해 조금 줄기는 했지만 연간 2만여대 정도가 수입되고 있다. 외국 차 전체 수입량도 대폭 증가했다. 올해 들어 10월까지 수입된 외국 차는 모두 7만4000여대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무려 52%가 급증했다. 이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여러 이유가 있지만 연비가 낮고 대형차 위주인 미국 자동차에 호감을 갖는 국내 소비자가 적다는 걸 말한다. 한마디로 미국 차는 기술적 성능은 좋을지 모르지만 국내에서는 매력이 없는 차다.

미국이 한국에 자동차를 많이 수출하고 싶다면 차를 우리 소비자가 원하는 규격과 스타일에 맞춰야 한다. 그러지 않고 국내 환경·안전 기준을 미국 차에 맞춰 완화하도록 윽박지르고, 한국 차의 미국 수출을 억제해 균형을 맞추려 한다면 그것은 ‘자유무역’이 아니다. 미국의 오만이고 일방적인 폭력일 뿐이다.

머큐리 세이블
머큐리 세이블

80년대 말에도 그런 억지가 있었다. 당시 칼라 힐스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는 자국 차 수입 확대를 요구했다. 우리 정부는 할 수 없이 프라이드를 미국에 많이 수출하고 있던 기아자동차로 하여금 포드의 머큐리 세이블(3000㏄급)을 수입해 팔도록 했다. 당시 국내 법규에는 자동차 방향지시등 색깔이 노란색으로 돼 있었는데 세이블은 빨간색이었다. 당연히 미국 쪽에서 국내 법규에 맞게 수정해 보내야 하는데도 기아자동차가 이를 고쳐서 팔도록 떠넘겼다. 오만의 극치다. 얼마 못 가 세이블의 인기는 뚝 떨어졌다.

미국의 자동차 보유 대수는 약 2억5000만대다. 지난해 미국내 자동차 판매 대수는 1000만대를 웃돌았다. 전세계 자동차 수출 대수는 110만대였다. 그 가운데 한국으로 6000여대가 수출됐다. 만약 미국이 한국에 온갖 압박을 가해 수출을 늘린다 하더라도 단기간에 1만~2만대를 추가로 늘리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겨우 1만~2만대의 수출 확대를 위해 한국에 그처럼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을까.

오바마 대통령은 정상회의 참석 전 국내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한-미 에프티에이를 세계 교역의 기준으로 삼겠다고 밝혔다. 미국 자동차회사들도 에프티에이를 미국 차 수출 장애물 제거 수단으로 활용하라고 미 정부를 밀어붙이고 있다. 결국 한국을 상대로 미국에 유리하게 협정문을 수정한 뒤 이를 다른 교역상대국에도 그대로 적용하겠다는 계산이다. 한국을 만만한 ‘모르모트’(실험용 쥐)쯤으로 여기고 있는 셈이다.

결론도 단순하다. 우리 정부가 한-미 에프티에이 타결을 원한다면 눈치껏 버티다가 미국 요구를 대부분 받아들이는 일만 남았다. 미국이 자신의 이익 확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재협상은 않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밝힌 만큼 우리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이런 재협상을 계속해야 하나. 정석구 선임논설위원 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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