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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아름다운 삶을 꿈꾼다 / 신기섭

등록 2010-11-18 20:29

신기섭 논설위원
신기섭 논설위원
1990년대 초반 큰 공장 노조위원장을 지낸 이를 얼마 전 만났다. 몇만명 조합원과 하나가 되어 민주노조 건설을 위해 싸웠고 위원장에서 물러난 뒤에도 현장을 지키고 있는 인물이다. 게다가 노동운동의 한복판에서 벗어나지도 않았다. 비정규직 싸움도 열심히 돕는다. 그를 만나기 전에는 “여전히 폭력이 난무하는 노동 현장에서 20여년을 버텼으니 얼마나 거칠고 험할까”라고 생각했다. 집단으로서의 ‘민주노조’는 영웅처럼 여길지언정 육체노동자 개개인에겐 거리감을 느끼는, 샌님 중에서도 골샌님인 나로선 이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예상을 완전히 깨뜨렸다.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에게서 종종 느껴지는 조바심이나 황폐함 따위는 찾을 수 없었고, 기품과 여유가 묻어나는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게다가 두서없는 술자리 대화에서도 중간중간 정곡을 찌르는 말들을 던진다.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말의 70% 이상이 남 욕하는 것”이라며 “이제 남 욕은 30%쯤으로 줄이고 나머지는 우리가 뭘 할지 이야기하자”는 그의 말엔 평소 내 소행이 탄로난 듯 뜨끔했다.

대체 어떻게 살았기에 쉰을 바라보는 노동자가 이럴 수 있는지 궁금해서 이것저것 귀동냥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공장 일을 시작한 그는 노동운동과 함께 세상의 진실에 눈을 떴을 터이지만, 누구 못지않게 공부도 열심히 한 사람이다. 대학 물 먹은 좌파 교양인이나 지식인들도 어려워 중도에 포기하기 일쑤인 카를 마르크스의 책들을 10년 동안 붙잡고 공부했다고 한다. 중국 노동자들과 대화할 기회가 있을까 싶어 중국어를 몇년 동안 배우기도 했다. 이걸로도 부족해 요즘 또 새로운 공부를 시작할 참이다. 육체노동으로 잔뼈가 굵어서 어디 내놔도 굶지 않을 능력에다 기품과 예리함까지 갖춘 노동자, 나로서는 머릿속에서만 그리던 인간형이다.

그를 보며 다르게 사는 게 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다르게 사는 길에 대해서 요즘 신물나게 듣고 있다. 누구는 우리 안의 욕망을 버리자고 하고, 누구는 대안공동체가 해법이라고 한다. 아이들을 입시지옥에서 해방시킬 대안교육을 강조하는 사람도 꽤 많다. 그런데 나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거부감을 느낀다.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 욕망을 품고 있기에 버리라고 종주먹을 들이대나 싶다. 대안공동체라는 것도 ‘선택된 소수’나 누릴 수 있는 것이지, 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벌어먹고 살기도 바쁜 노동자들로선 자식한테 대안교육의 기회를 주는 게 특목고 진학 기회를 열어주는 것만큼이나 좁은 문이다.

다르게 살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건 욕망을 버리지 못해서도, 대안공동체나 대안교육을 선택할 결단력이 없어서도 아니다. 또 다르게 살더라도 이웃들과 부딪치며 함께 사는 게 아니라면 현실도피와 얼마나 다를까 싶다. 게다가 진학이든 일자리 얻기든, 치열한 경쟁에서 이겨야만 가능한 사회구조가 확 바뀌지 않는 한, 경쟁에서 처지는 사람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현실이 이런데 욕망만 버리면 ‘낙오자’ 딱지에서 자유롭고 당당하게 살 수 있을까. 지금 현실에선 대안교육을 거쳐 대안공동체에서 ‘멋지게 사는’ 소수마저 평범한 다수한테 열등감을 안기는 존재다.

결국 현실을 바꿔야 하는 건데, 그 방법의 하나는 세상의 가치를 정면으로 뒤집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려면 매일매일 육체노동을 하더라도 당당하게 사는 사람을 보여주고 확인하는 게 필요하다. 또 노동자가 세상에 눈을 뜨면 삶의 진정한 의미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믿음과 실천도 중요하다. 특히 자라나는 세대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결국 세상을 바꿀 거라고 믿는다. 아니 세상을 바꾸지 않아도 그만이다.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도 누리지 못하는 ‘빛나고 아름다운 삶’을 그들이 얻는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신기섭 논설위원 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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