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외국 정상들이 한국을 방문하면 학생들은 두 나라 국기를 든 채 길거리로 내몰렸다. 언론은 연일 국민 동원에 앞장섰다. 주요 20개국(G20) 회의를 치르느라 국민들은 동원 대상으로 전락했다. 역시 바람잡이는 언론이었다.
장밋빛 전망을 쏟아내며 금방이라도 세계를 이끌어가는 나라가 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정권이야 대형 국제행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언론은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 불러주는 대로 받아쓰고 부풀리기에 앞장서는 언론은 홍보기관일 뿐이다. 일부 언론들은 정상회의 성공이 곧 국익이고 언론은 이를 위해 손님맞이 분위기를 만드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 있었다. 그저 국민들에게는 의장국이라는 환상을 심어주는 한편 외국에는 우리나라를 잘 치장하여 비추는 것이 국익을 위해 언론이 할 일이라 믿은 듯하다.
이런 언론들에 비판적 보도는 설 자리가 없다. 그런 우리 언론들의 보도는 국익에 보탬이 되기는커녕 국민들의 비판과 외국 언론의 비웃음만 샀다. 그토록 내세우던 국격은 오히려 구겨졌다. 우리 국민은 이제 언론에 의해 동원될 수준은 훨씬 넘어섰다. 다만 언론들과 정권만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언론의 빗나간 애국주의는 아시안게임 보도에서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경기 관련 보도가 연일 신문 지면을 덮고, 방송사들은 뉴스 시간의 반 이상을 할애해 아시안게임 보도를 쏟아낸다. 보도량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선수와 팀에 대한 일방적 애국주의 보도는 더욱 심각하다. 메달 수 집계에 집착하며 우리 사회의 고질병이라고 하는 서열화 부추기기에 앞장선다. 우리나라 선수들의 선전을 통한 국민들의 대리만족 만들기에 여념이 없는 언론들이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그 가치를 받아들이기보다는 획일적으로 한 줄로 세워 등수를 매겨야 직성이 풀리기 때문일 것이다. 언론이 국제경기를 국가간의 경쟁으로 만들고 승리와 메달 획득을 중심으로 보도하는 문제는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엘리트 선수들 중심의 잔치이긴 하지만 아시안게임은 아시아인들의 축제이다. 경기는 기본적으로 경쟁이라는 속성을 띨 수밖에 없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아시아경기대회를 계기로 공동체 안에 있는 다른 나라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넓히고 소통의 기회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본래의 의미는 이미 퇴색된 지 오래라고 치자. 그렇다고 마냥 거기에 영합하고 편승하는 것은 언론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언론은 대회 보도를 통해 최소한 상생과 평화 그리고 공존이라는 의미를 찾으려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한국의 언론이 한국에 좀더 우호적인 보도를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우리 선수가 경기에 이기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느 국민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경기의 승패에만 집착하는 모습은 원래 의미를 변질시켜 버린다.
애국주의는 필연적으로 정권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그렇기에 언제나 독재정권은 애국심을 강조하고 큰 국제행사와 스포츠를 이용한다. 이를 부추기는 데는 역시 언론이 가장 적격이다. 언론의 애국주의와 선정주의가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지는 것이 국가 대항 스포츠 경기이다. 국가대표 선수들의 경기에 국민들은 열광하고 시청률은 올라간다.
그 무엇이든 지나치면 독이 된다. 자국 중심의 보도는 국가간의 경쟁과 반목만 불러올 뿐이다. 자칫하면 축제를 싸움판으로 만들 판이다. 경기 판정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대만에서 태극기가 불타고 우리 제품들이 길거리에 내팽개쳐지고 있다. 우리 국민의 마음속에도 다른 나라에 대한 경쟁과 배타적 의식의 씨앗을 언론이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언론의 편협한 애국주의가 인류 공동의 평화와 화합의 걸림돌을 만든다. 애국주의는 진실을 찾으려는 합리적 의문조차 ‘어느 나라 국민이냐’고 몰아붙인다. 낡은 애국주의의 망령 때문에 진실이 설 땅이 날로 척박해진다.
정연우 세명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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