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순 대기자
올해는 국치 백년을 맞아 관련 기획을 다루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한국과 일본의 현대사가 얼마나 뒤엉켜 있는지 새삼 절감했다.
도쿄 스미다구 야히로에 1923년 간토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 추도비가 세워져 있다. 시민단체가 헌금을 모아 학살 주체를 추도비에 명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조형물이다. 모임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는 전직 학교선생은 취재가 대충 마무리되자 한겨레신문사에서 근무했던 사람의 조부가 당시 목숨을 겨우 건졌다는 얘기를 꺼냈다. 혹시 이름을 기억하느냐고 했더니 찾아보면 자료가 나올 것이라고 했다. 나중에 우편으로 보내준 봉투에는 창간 초기 그림판으로 이름을 떨친 박재동 화백의 낯익은 필체로 쓰인 설명문이 몇 꼭지의 그림과 함께 들어 있었다. 1898년생인 조부가 20대 시절 도쿄 부근의 항구에서 막노동을 하다가 조선인 학살을 겪었다. 하숙집 주인이 성실한 청년이라고 숨겨주는 바람에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까딱했으면 우리는 그의 그림판을 보지도 못할 뻔했다.
홋카이도 최북단의 한 작은 마을에 갔을 때는 최근 타계한 리영희 선생의 얘기를 들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조선인들이 비행장 건설에 동원됐던 아사지노에서는 수년 전부터 한국과 일본의 대학생, 청년,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모여 희생자들의 유골 발굴작업을 벌였다. 현지에서 소규모 건설회사를 운영하면서 자치회장을 맡고 있는 70대 중반의 노인은 리 교수의 감동적인 말씀을 들었다고 했다. 2006년 발굴현장을 찾은 리 선생이 그동안 이런 것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으니, 이 자리에 참석한 대학교수들부터 학생들에게 보고서를 쓰게 해 체험을 살려가자고 제의를 했다. 교수를 지냈다고 들었지만 그 정도로 대단한 분이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리 선생은 2년 뒤 민간 차원에서 유골 반환이 이뤄졌을 때도 봉은사 주지로 있던 명진 스님을 소개해 작업을 도왔다.
이런 인연으로 리 선생의 빈소에는 두 사람의 일본인이 왔다. 한 사람은 ‘강제연행 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 포럼’의 공동대표인 도노히라 요시히코 스님이다. 그는 리 선생이 안장되는 광주까지 가려 했으나 지병이 갑자기 도져 병원 응급실에 실려가기도 했다. 또 한 사람은 고바야시 지요미 전 민주당 의원이다. 노동·평화운동에 관여했고 발굴작업에도 참여했던 고바야시는 ‘전후보상을 생각하는 의원모임’의 일원으로 서울에 왔다가 빈소에 들렀다. 이들은 리 선생이 위독하다는 얘기를 듣고 지난 11월14일에도 입원중인 녹색병원을 함께 찾았다. 당시 리 선생은 거의 혼수상태였지만, 나중에는 미소를 띠며 가냘픈 목소리로 고맙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아마도 리 선생이 이승에서 한 마지막 말이었을지 모른다.
이런 얘기를 길게 늘어놓는 것은 소중한 인연들이 그냥 묻혀버리기 때문이다. 남북한의 평화뿐만 아니라 한반도와 일본의 진정한 화해를 바랐던 리 선생의 부음은 일본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의 중앙언론들은 간단한 부음기사로도 다루지 않았다. 1970, 80년대 민주화운동을 열심히 보도하던 때와는 사뭇 다르다. 단지 <교도통신>이 고인을 한국의 대표적 ‘혁신계 평론가’로 지칭하고 그의 저서는 민주화운동의 바이블로 불렸으며 만년에도 혁신세력의 정신적 지주로 알려졌다고 전했다.
같은 차원에서 비교할 것은 아니지만 쓰노다 후사코란 작가가 올해 초 타계한 사실도 국내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다. 그의 대표작에 한-일 현대사의 비극을 소재로 한 <민비 암살>, <슬픔의 섬 사할린>, 우장춘 박사를 다룬 <나의 조국> 등이 있으니 이름을 기억하는 국내 독자들이 제법 있었을 것이다. 그가 정월 초하루 세상을 떠났다는 것은 일본에서 2개월이 지나서 공개됐다. 남북간에는 전면전 불사가 거론되고 일본 총리의 입에서 한반도 유사시 자위대 파견 얘기가 나왔다. 국치 백년에 이런 세밑을 맞게 될 줄이야.
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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