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구 선임논설위원
‘잃어버린 10년’이라며 지난 정권의 주요 정책을 모두 부정했던 이명박 정부에서 복지 논쟁이 활발하게 벌어지는 것은 다소 의외다. 분배나 복지에는 체질적으로 거부반응을 보이는 보수정권의 유력한 대선후보까지 복지국가 건설을 주창하고 나섰으니 세상이 많이 변하긴 한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의 복지 논쟁에는 중요한 논점이 두가지 빠져 있다. 복지 개념에 대한 철학적 인식과 재원 조달 방안이 그것이다.
우리나라에 복지체계의 뼈대가 형성된 것은 국민의 정부 때다. 1999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생산적 복지’란 개념을 처음 제시하며, 이를 민주주의, 시장경제와 함께 3대 국정지표로 제시했다. 그해 9월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으로 이를 구체화했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 도입은 최저생활을 보장받을 헌법상의 권리를 법제화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사회보장제도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복지는 국가의 시혜가 아니라 국민의 권리이자 국가의 의무라고 규정함으로써 복지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혔다.
최근의 복지 논쟁 속에서는 이런 철학적 고민을 찾아보기 힘들다. 복지에 대한 개념 정립이 제대로 안 돼 있다 보니 정말 개념 없는 발언들이 속출한다. “왜 65세 이상이라고 지하철도 적자이면서 무조건 표를 공짜로 줘야 하느냐”고 반문하는 총리가 있는가 하면, “우리가 복지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대통령의 어처구니없는 발언이 이어진다. 복지에 대한 명확한 철학적 인식 없이 제시되는 복지정책은 상황과 여건이 변하면 방향을 잃고 흔들리기 마련이다. 각자가 다양한 복지 모델을 내놓기 전에 복지란 무엇인지에 대한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논쟁부터 치열하게 벌여야 하지 않을까. 무상급식을 둘러싸고 보편적 복지 논쟁이 이어지고 있지만 논쟁의 대상과 폭을 더욱 확대할 필요가 있다. 이런 과정 없이 표만 의식하고 벌이는 복지 논쟁은 선거가 끝나면 썰물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십상일 테니.
복지 재원 조달과 관련해서는 참여정부가 만든 ‘비전 2030’을 참고할 만하다. 2006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저출산·고령화와 소득 양극화 심화에 대비한 사회안전망 체계를 완비할 목적으로 ‘비전 2030’을 만들었다. 이 정책을 추진하는 데 1100조원이 들 것으로 추산했다. 연간 50조원 정도가 투입되는 막대한 규모였다. 야당과 보수언론들은 ‘증세는 안 된다’며 거세게 반대했지만 참여정부는 이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대응했다. 재원 조달 방법으로 전액 증세, 전액 국채 발행, 증세와 국채 발행 혼합 등 3가지를 제시했다. 당시 재정계획을 짰던 기획예산처는 ‘우리의 경제규모를 감안할 때 2030 재원은 세금으로 마련하는 게 가능하다’고 판단했지만 이런 의견이 공식화되지는 못했다. (이백만, <불멸의 희망>)
하지만 지금 진행되고 있는 복지 논쟁에서는 소요 재원과 관련한 논의가 대부분 빠져 있다.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의 생애보장 복지에 대해 “세금 얘기는 감춰놓고 무조건 복지만 잘해 주겠다고 얘기하는 것은 좀 솔직하지 못한 태도”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민주당 일부와 진보정당 등이 복지 재원 조달을 위해 부유세 신설 등을 주장하지만 아직은 원론 수준에 머물고 있다. 중장기적으로 복지 확충에 들어가는 예산을 추정하고 이를 조달할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뒤 이런 방안의 실현 가능성을 심도있게 논의해야 한다. 재원 조달 방안이 뒷받침되지 않은 복지정책은 현실성이 결여된 반쪽짜리 정책에 불과하다.
복지 논쟁은 이제 시작이다. 최소한 2012년 대선 국면까지는 계속될 것이다. 앞으로 2년여 동안 치열하고 생산적인 논쟁을 벌여 우리나라가 선진국 수준의 복지국가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사족 한마디, 제발 논쟁 과정에서 ‘사회주의적’ 운운하는 저열한 공방은 하지 말기를.
정석구 선임논설위원 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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