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항우 충북대 사회학과 교수
지금으로부터 24년 전인 1987년 1월 중순의 어느 날 아침, 나는 안양의 한 버스정류장 가판대에서 신문 한 부를 샀다. 세미나를 하러 친구의 자취방을 찾아가던 길이었다. 신문을 펼쳐든 순간, 나는 너무나도 놀라운 소식에 마구 떨리는 심장과 후들거리는 팔다리를 겨우 진정시켜야만 했다. 박종철, 박종철이 서울 남영동의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다가 숨졌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전두환 정권의 폭정에 저항한 운동권 학생이었지만, 나에겐 신림동의 하숙방과 자취방에서 함께 대화하고 웃고 놀았던 다정다감한 선배이기도 하였다.
그런 그가 정권의 무자비한 폭력에 끝내 숨을 거두었단다. 너무나도 원통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두려웠다. 나는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세미나는 취소됐고, 그날의 기억은 햇볕 없는 한겨울의 매섭도록 추운 날씨로 나에게 남아있다. 시신 없이 학교 캠퍼스에서 진행된 장례식에서 나는,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울었던지. 우는 게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며 얼마나 많이 울었던지….
1985년 가을 박종철을 처음 만난 후, 나는 그를 비롯한 10여명의 선배·동료들과 한동안 자주 모임을 가졌다. 하루는 노량진의 한 중국음식점에서 1·2·3학년 서클 멤버들이 한데 모였다. 2학년인 박종철은 그날 모임의 총무 역할을 했다. 방에서 자장면을 먹으며 모임을 진행하고 있을 즈음, 화장실을 다녀온 동료들이 음식점 홀에 경찰관 두 명이 앉아 있다는 사실을 알려왔다.
회의는 즉각 중단됐고, 우리는 하나둘 그곳을 빠져나가기로 하였다. 나는 아무 일 없는 듯 홀을 지나 건물을 나와 큰길 버스정류장에 서 있었다. 대부분의 선배·동료들이 무사히 빠져나온 듯했다. 그런데 맨 마지막 즈음에 나오던 박종철이 갑자기 8차로 이상의 큰길에 뛰어들어 퇴근길 자동차들 사이로 마치 곡예라도 하듯 달려가고 있지 않은가? 너무나도 위험스러운 광경이었지만, 그는 중요한 무엇인가를 지키기 위해 차량이 질주하는 대로에 뛰어드는 위험을 마다하지 않은 것임에 분명했다.
해마다 1월14일 그의 기일이 되면 나는 친구들과 함께 마석에 있는 그의 묘에 참배하러 가곤 한다. 물론 옛날 중국집이나 자취방에서 박종철과 함께 만났던 바로 그 사람들과 함께 가지는 않는다. 2007년 1월14일은 처음으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추모제를 했고, 추모제 뒤 그가 고문받다 숨져간 방을 찾아 그의 명복을 빌었다. 이제는 세상이 많이 변했고, 나도 많이 변해서 그냥 흘러내리는 눈물 말고는 예전의 나를 확인하는 건 특별한 일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됐다.
그러나 2007년 1월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했던 경험, 20년 전 박종철이 끌려 올라갔던 1층에서 5층까지 곧바로 연결된 철제 회오리 계단을 그대로 밟으며 가졌던 느낌, 나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 입으로 표현된 그 경험은, 아찔한 현기증과 추락의 공포감이었다. 어찌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제는 비교적 평온한 마음에서 밟았을지도 모르는 철제 회오리 계단이, 우리의 마음에서 평온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공포로 채우며 우리에게 질문했다, 편하냐고.
박종철의 죽음이 촉발한 87년의 민주화 대투쟁. 그리고 그로부터 20년간의 이른바 민주화 시대. 이제 다원주의가 맞고 또 진정한 자유주의자로 살아야겠다고 오랫동안 다짐해온 나에게, 그러나 2011년 오늘은 점점 더 철제 회오리 계단이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나는 24년 전 박종철이 극한의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도 지키고자 했던 신의와 가치가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물으려 마석에 간다. 민주주의는 결코 어느 순간에 일단락되거나 완성되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끊임없이 확대하고 심화시켜야 하는 것이라는 새삼스런 사실을 전하러 마석에 간다.
이항우 충북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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