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례 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 대표영화감독
지난해 11월 말 경북 안동에서 구제역이 발생한 뒤 200만마리에 가까운 소·돼지가 살처분됐다. 뒤따른 조류인플루엔자로 인해 살처분된 닭과 오리는 350만마리를 넘었다. 한국 축산 역사상, 아니 동물 역사상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1조원이 넘는다는 피해액과 축산농민과 살처분 공무원들의 정신적 트라우마, 대규모 생매장으로 인한 2차 환경오염 문제가 거론되지만, 생명인 동물의 기본권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는 상황이다.
한국도 가입한 세계동물보건기구(OIE)의 규정에는 전염병 방역을 위해 동물을 죽이는 경우, 가스법이나 전살(전기충격)법을 사용하거나 규정된 약물을 주입해 고통을 최소화하도록 규정한다. 우리 법률도 마찬가지다. 가축전염병예방법이나 동물보호법 등에 비춰봐도 생매장은 불법행위이자 동물학대행위이다. 하지만 소들은 근육마비제 주사로 의식이 살아있는 채로 도살된다. 돼지와 닭들은 아예 산 채로 매장되는 야만적인 도살이 자행된다.
희생 동물이 많은 이유는 구제역 발생 농가 반경 3㎞ 안의 우제류 동물을 모두 죽이는 ‘예방적 살처분’ 때문이다. 이 조처가 구제역 확산 방지에 도움이 못 됨이 실증되고 있는데도 정부는 이를 강행한다. 지난해 봄 일본 미야자키현처럼 구제역 발생 농가의 동물만 인도적 살처분을 하고, 신속한 감염경로 차단과 꼼꼼한 소독과 방역으로 구제역 확산을 막아낸 전례를 활용할 생각은 못한다. ‘묻지마 살처분’만을 능사로 아는, 정부의 극도로 둔감한 ‘생명지수’에 개탄을 금치 못한다.
정부는 지난해만 해도 세번째 발생한 구제역의 초동대응에 실패했다. 청정국 지위 유지에만 집착해 적절한 백신 접종 시기를 놓쳤다. 급기야 구제역이 급속도로 퍼져 100만마리의 동물이 살처분된 뒤에야 백신을 접종했다. 뒤늦게 돼지에게도 접종하겠다고 발표했지만, 그나마 어미돼지와 종돈에만 한정했다. 생명이 아닌 경제적 가치로만 농장 동물을 바라보는 정부 시각의 편협성이 드러난다.
지난해 4월과 5월 두달 동안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이라는 영화를 찍으면서 열살짜리 수소 ‘먹보’랑 전국을 주유했다. 먹보는 영리하면서도 당당했다. 옛사람들이 소를 영물 취급하는 이유에서 알 수 있듯이 때로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느긋하게 쉬고 있을 때 카메라 앞으로 데려오면, 싫은 기색이 역력하다가도 ‘너희들이 그리 애를 쓰니 내가 한번 협조해주마’ 하는 느낌으로 무거운 몸을 일으켜 카메라 앞으로 다가올 때가 많았다.
카메라감독의 사랑도 독차지했다. 먹보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줬으면 하는 순간에 고개를 돌려주고, 움직여줬으면 하는 대목에서 어김없이 움직여준다며 칭찬일색이었다. 스태프들은 촬영 쫑파티에서 먹보가 슈퍼마켓에서 보던 소고기가 아니라 ‘생명’임을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수확이라는 언급을 많이 했다. 요즘 이 끔찍한 상황에서 먹보가 혹시 화를 입을까 걱정돼 주인과 문자를 주고받으며 안부를 묻는다.
며칠 전 먹보가 백신을 맞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땅의 모든 소들이 먹보와 무엇이 다를 것이며 소와 돼지, 닭은 또 어떻게 다르다는 것일까? 모든 생명은 우리 인간과 마찬가지로 지각과 감각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이를 간과하기에 살처분과 생매장의 홀로코스트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리라.
정부의 부실한 대응을 비판하나, 이 끔찍한 사태의 ‘진정한 배후’엔 과도한 육식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질 낮은 사료를 먹이고 과다한 항생제를 주입하고 더러운 위생환경에서 그들을 방치한다. 터무니없이 부족한 사육공간과, 햇볕과 바람이 들지 않는 곳에 그들을 가둬 기른다. 그들이 병에 걸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과연 가당한 일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육식을 줄이는 것만이 동물들에게 최소한의 복지를 제공하고, 인간이 인간답게, 생명이 생명답게 살 수 있는 근본 대책이다.
임순례 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 대표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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