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경 세이브더칠드런 권리옹호부장
얼마 전, 한국에서 사는 아프리카 ㄱ국 출신 여성이 아이를 낳았다. 난민 신청자이다. 아이는 언젠가 고국에 보내고 싶은 마음에 그는 아이의 국적 취득을 하기로 했다. 한국엔 ㄱ국 대사관이 없어서 이웃 나라 주재 대사관에 연락해야 한다.
정부의 박해를 피해 탈출한 난민 신청자가 본국 대사관에 연락해 아이의 출생신고를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난민은 정치적 견해, 종교나 인종 또는 특수한 집단적 정체성으로 인한 억압과 박해를 피해 자신의 국가에서 탈출한 사람이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난민 신청자들이 본국 대사관에 연락하는 일은 탈출 과정에서 수없이 갈등했을 신념 문제를 없던 것으로 한 채 “나 여기 있소” 하고 자진 출두하는 거나 마찬가지의 심리적 부담을 주는 일이다. 이 여성은 아이를 위해 어려운 결심을 한 것이다. 그 뒤 과정은 쉬웠을까?
이웃나라 주재 ㄱ국 대사관은 아이가 한국 땅에서 태어났음을 증명하는 정부의 ‘공문서’를 요구하며 국적 부여를 거부했다. 한국 정부도 부모 중 한 명이 한국인이 아니면 아이의 출생신고를 받지도 않고, 출생증명을 발급하지 않는다. 이 여성을 돕던 단체가 외국 아이의 출생신고를 받지 않는 한국 법을 설명하면서 지원에 나섰지만 일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출생신고와 등록은 그야말로 존재에 대한 증거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모든 생명은 이름 말고도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어느 나라 사람인지에 대해 법적 인정을 받을 권리가 있다. 출생에 대한 공적인 기록이 없는 아이는 누구에게나 보장된 기초적 권리조차 누리기 어렵다. 유엔아동권리협약 7조는 모든 아이가 이름과 국적을 가질 권리가 있음을 명시한다. 난민 신청자이든, 이주민이든, 국적권자이든 상관없이 아이들은 태어난 지역의 법적 관할권을 지닌 국가에 등록될 권리가 있다.
그러나 한국 땅에서 난민 신청자가 아이를 낳으면, 이 아이들은 피와 살로 현존하는 존재인데도 ‘보이지 않는 아이들’이 된다. 아이는 무국적자가 된다. 현재 국내에는 이 문제를 해결할 법적 절차가 없다.
국적 없이 그럭저럭 살아도, 출생증명 ‘공문서’가 없다면 이 아이들은 자라서도 무국적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의료·교육 서비스를 받거나, 결혼하거나 운전면허증을 갖고 투표하고 일을 하면서 신용을 인정받을 경로 자체를 근원적으로 차단당한다.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한 아이가 어느 땅에서, 어느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정부가 기록해줘야 한다. 한국 정부가 속인주의의 현행 국적법을 안 바꿔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최근 세이브더칠드런, 유엔아동권리협약을 위한 엔지오 그룹 등 12개 국제 어린이·난민 관련 인권단체는 성명을 내어 모든 나라에서 모든 아이들에 대한 출생등록이 시급히 이뤄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출생등록은 인권 실현의 선결요건이다. 아이를 폭력과 착취, 학대로부터 보호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첫 단계다. 유엔난민기구의 2009년 기초조사를 보면, 103개 난민캠프에서 태어난 신생아 중 공식적인 출생증명을 발급받은 아이는 46%에 불과했다.
지난해 말 기준 한국에 체류하는 난민 신청자는 2915명이다. 이 중 난민으로 인정된 사람은 222명이다. 난민 신청은 늘지만 한국은 이들에게 가혹한 땅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국 평균 난민보호비율은 인구 1000명당 2명이다. 한국은 인구 100만명당 2명에 불과하다. 억압과 박해를 피해 한국에 온 이들 앞에 놓인 것은 차별과 배제뿐이다.
어른은 양심과 신념에 따른 결정을 고난으로 감당한다고 쳐도, 그 아이들에게까지 그만큼의 고난을 함께 짊어지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한국에서 태어난 난민 신청자의 아이들은 출생등록도 받지 못하고, 필수 예방접종 등 어떤 종류의 의료혜택도 받지 못한다. 한 사회의 수준을 보려면 그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자의 삶을 보라고 했다. ‘보이지 않는 아이들’, 난민 신청자의 아이들이 그들이다. 김희경 세이브더칠드런 권리옹호부장
어른은 양심과 신념에 따른 결정을 고난으로 감당한다고 쳐도, 그 아이들에게까지 그만큼의 고난을 함께 짊어지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한국에서 태어난 난민 신청자의 아이들은 출생등록도 받지 못하고, 필수 예방접종 등 어떤 종류의 의료혜택도 받지 못한다. 한 사회의 수준을 보려면 그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자의 삶을 보라고 했다. ‘보이지 않는 아이들’, 난민 신청자의 아이들이 그들이다. 김희경 세이브더칠드런 권리옹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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