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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효순 칼럼] 원전대국에서 벌어지는 실제상황

등록 2011-03-13 20:01수정 2011-06-23 13:25

구제역 사태를 겪으면서 내리 찜찜했다. 멀쩡한 소와 돼지를 그냥 생매장하는 것을 보면서 이러다가는 우리가 천벌을 받게 되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구역을 정해놓고 그 안의 가축을 획일적으로 죽이는 살처분 발상의 뿌리가 너무 무서웠다. 죽임의 대상이 꼭 사람이어야 홀로코스트가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이웃나라 일본에 저 정도의 대재앙이 나타나리라고는 꿈속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다. 선진국 가운데 일본같이 체계가 잡히고 치안이 좋은 나라도 드물다. 그러나 일본 사회에 조금 익숙해지면 경계심이 절로 몸에 밴다. 사람이 아니라 지진 같은 자연재해 때문이다. 일본은 섬나라이니 어디에 가도 바닷가의 절경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경관을 즐기며 느긋하게 산책을 하더라도 마음의 한구석에는 비상사태 대비 기제가 은밀하게 작동한다. 바닷가에는 큰 진동이 느껴질 경우 쓰나미에 주의해야 한다는 경고판들이 있다.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바닥이 요동을 치면 바로 100m 달리기에 나설 태세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이번 대지진에서 일본인들이 보여준 모습은 역시 감탄스럽다. 대도시의 대중교통이 거의 마비된 상태에서도 길게 줄을 서서 운행중인 버스편을 기다린다. 광범한 지역에서 정전이 지속되고 있지만, 약탈이나 사재기 등의 큰 혼란은 보이지 않는다. 몸에 익은 방재훈련의 성과이다. 지진에 대비해 머리에 방재두건을 쓰고 책상 밑으로 들어갔다가 밖으로 대피하는 훈련을 유치원 때부터 한다. 9월1일은 방재의 날로 지정돼 있다. 1923년 간토대지진이 발생한 날이니 한국인들에게는 마음이 편치 않은 날이기도 하다. 이날을 포함한 1주일은 방재주간으로 선포돼 재난 대비 교육이나 피난훈련을 전국적으로 벌인다.

일본 사회는 흔히 매뉴얼의 사회로 불리기도 한다. 방재 교본도 잘 갖춰져 있다. 하지만 아무리 대비를 해도 상정한 수준을 넘어서는 재앙이 발생한다는 것이 이번에도 증명됐다. 거대한 쓰나미가 인간이 만든 온갖 조형물을 휩쓸고 가는 모습을 티브이 화면으로 보면서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대재앙을 다룬 영화에서 눈에 익었던 컴퓨터 그래픽 영상처럼 보였다.

대지진이 나기 바로 2주 전 일본의 대표적 평화군축운동 시민단체인 ‘피스데포’가 주최한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에 있었다. 피스데포는 동아시아의 군비 완화와 비핵화를 위해 오랜 기간 활동해온 단체다. 1980년대 중반 유럽에서 미국과 소련의 중거리 핵미사일 배치 계획에 대해 거센 항의운동이 벌어졌을 때 태평양지역에서 토마호크 순항미사일 배치의 위험성을 널리 알리기도 했다. 1991년 9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한반도에서 모든 전술핵무기의 철수를 선언한 것도 이런 반핵운동의 성과이기도 하다. 세미나의 취지는 비핵화 부문에서 도리어 역주행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상황을 점검해보고 시민운동의 구실을 논의하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북한이 운영하거나 건설을 추진하고 있는 원자로에 내진설비가 제대로 갖춰지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이번 대지진은 핵의 군사적 측면 못지않게 평화적 이용도 문제가 많음을 드러내주었다. 일본은 프랑스와 함께 세계 유수의 원전대국이다.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을 가장 많이 받는 나라에 들어갈 정도로 원전이 많다. 관련 기술도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매뉴얼을 갖춰 놓고 대비를 해도 불의의 사태가 벌어지게 마련이다. 이번 후쿠시마 원전 사태는 제어되지 않으면 바로 핵무기로 변할 수 있는 원전의 공포를 생생히 보여준다.

우리도 어느 틈에 원전대국이라고 은근슬쩍 자랑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요란하게 수주를 선전했던 원전 기공식에 참석하려고 아랍에미리트연합을 방문하는 동안 매뉴얼을 엄수해온 나라에서 벌어지는 재앙에 온 세계가 놀라고 있다. 구제역 사태에서 보듯 우리는 급하면 매뉴얼도 무시하고 미봉을 한다. 과연 괜찮을까? 대기자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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