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구 논설위원
김종구 논설위원
현 정부가 들어선 해인 2008년 말,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한나라당의 한 원로급 정치인이 맹형규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을 만나 개헌 추진을 적극 권유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개헌의 필요성을 설득한 논리가 흥미롭다. 정권이 바뀌면 비비케이(BBK) 사건에 대한 재수사가 불가피하니 분권형 개헌으로 차기 대통령의 힘을 빼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맹 수석도 그런 설명을 경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권 초라는 시기적 특성상 개헌은 관심사의 뒷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원로 정치인한테서 이런 내용을 직접 들은 야당의 한 중진의원이 전해준 이야기다.
한나라당 친이계에서 뒤늦게 들고 나온 개헌론이 비비케이 재수사 문제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주목할 대목은 비비케이 사건 수사 결과에 대해서는 여권에서조차 반신반의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위의 이야기는 그런 기류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예화인 셈이다.
이번 정권처럼 각종 사건을 놓고 재조사니 재수사니 하는 말이 많이 나온 정권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총리실 불법 민간인 사찰 사건에서 탤런트 고 장자연씨 사건에 이르기까지 서둘러 덮어버린 의혹의 사건들이 너무 많아서다. 완전히 마르지 않은 장작을 희나리라고 하는데 반쯤 타다 만 희나리 사건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 것이다. ‘사랑의 희나리’는 애처롭기라도 하겠지만 ‘사건의 희나리’는 볼썽사납기 그지없다.
불완전연소된 희나리는 다시 불씨를 댕기면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장자연씨 편지 사건이 그렇다. 필적감정 결과 비록 가짜 편지로 밝혀졌다고는 하지만 단순한 해프닝으로만 치부하기 어렵다. 이 편지 사건을 계기로 ‘조선일보 사주 일가가 장자연씨와 만났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 한 예다. 그것도 <조선일보> 쪽이 먼저 나서서 “장씨가 문건에 쓴 ‘조선일보 사장’은 스포츠조선 전 사장”이라고 지목한 것이 도화선이 됐다. 그런 기사가 얼마나 당사자에게 치명적인지 그 신문이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사주 구하기’라는 절체절명의 목적 앞에서는 비정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것은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사주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그 동네 사람들의 예의범절도 상황이 이쯤 되면 무용지물인 모양이다. 축소수사 의혹에 직면한 경찰이 앞으로 이 난감한 사안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지켜볼 일이다.
그동안 암매장됐던 다른 사건들도 하나둘 지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2년 동안 사실상 국외도피를 하다 귀국한 한상률 전 국세청장,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약속이나 한 듯이 제 발로 국내에 들어온 에리카 김에 대한 수사가 그것이다. 하지만 그 수사는 타다 만 장작을 완전연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예 다시는 타지 못하도록 물을 끼얹는 작업으로 보인다. 한 전 청장 사건의 경우 수사의 기본이라 할 계좌추적마저 외면하고 있다고 한다. 이 사건들의 언저리에는 밀약, 주고받기, 영원한 함구, 선처 약속 등의 음습한 단어들이 어른거린다.
운도 따라주고 있다. 때마침 일본열도에 몰아닥친 지진과 해일의 여파로 국내 현안들은 국민의 시야에서 씻겨나갔다. 한 전 청장 사건이나 에리카 김 사건뿐 아니다. 국정원 직원들의 인도네시아 특사단 숙소 침입 사건 수사는 실종 신고라도 내야 할 형편이다. 상하이 외교관들의 외도 사건 역시 까마득한 기억의 저편으로 멀어져갔다. 당사자들이 내쉬는 안도의 한숨소리가 귀에 잡히는 듯하다. 이명박 대통령이 무릎 꿇고 기도한 덕택인지 모르겠지만 원세훈 국정원장 등 사건 관련자들은 참으로 복도 많다.
하지만 복과 화는 종이 한 장 차이다. 복이 더 큰 화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 세상사 이치다. 암매장된 진실은 언젠가 스스로 두꺼운 지각을 뚫고 땅 위로 솟아오르며, 타다 만 장작더미도 한번 불길에 싸이면 걷잡을 수 없는 법이다. 비비케이 사건 재수사에 대비해 개헌을 하라고 권유한 원로 정치인은 오랜 경험으로 그런 이치를 꿰뚫어 보았는지도 모른다.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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