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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문화칼럼] 다시 불을 밝히는 작가들과 함께 / 김대중

등록 2011-03-18 20:26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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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화책 공동대표
산 너머 어둠이 퍼져나간다. 금세 밤이 찾아왔다. 운동장 한편에 있는 닭장에선 얼마 전 이사 온 닭들이 아직도 이곳이 낯설다는 듯 목청껏 울어 댄다. 이제 따뜻해질 만도 한데, 봄은 아직이다. 여기 충북 제천 청풍호 아래 자리잡은 ‘마을이야기학교’로 출판사 사무실과 생활을 옮긴 지 6개월이 지났다. 배추와 무를 심어 김장을 하고, 그 땅에 심어 놓은 마늘 두 접이 혹독한 지난겨울의 추위를 뚫고 어느새 땅을 뚫고 싹을 틔워 올라왔다. 그사이 개와 고양이를 들여오고, 닭장을 지어 닭을 모셔다 놓고는 아침마다 감사히 달걀을 받는다. 좌충우돌하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사이 마을 주민들과도 낯을 트고 겨울을 나름 견뎌냈다.

귀촌도 귀농도 아니다. 그저 서울 생활을 더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출판사를 시작한 후, 책이며 뭐며 짐이 쌓일 때마다 더 넓은 공간을 찾아 후미진 공간을 옮겨다녔지만, 이제 빠듯한 사무실 살림에 그것도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미 수년 전부터 서울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이 되어가는 품새를 보니, 내가 하는 일이 경제적 성공을 거두기 어렵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새만화책’은 만화 문화와 관련하여 출판과 전시, 작가 양성 프로그램의 교육 사업 등을 10년째 해 오고 있다. 함께하는 작가 20여명과 이 일을 더 오래 하려면 기초적인 생활의 안정이 필요한데, 여전히 그런 환경은 요원하다.

작업을 위해 돈을 벌고 일을 하자고 했던 것이 어느새 돈을 위해 작업을 하고 있는 상황이 되고, 입시 전선에 일용직에 비정규직 등 각종 아르바이트를 떠돌며 작업도 생활도 챙기기가 어렵다.

경제적 고립은 무엇보다도 마음의 문제이다. 작가들은 이제 20대는 30대가 되고, 30대는 40대가 되었다. 가정을 꾸리고, 집을 사고, 차를 사고, 보험을 들고, 주변의 대소사를 챙기는 보통의 삶은 저 멀리에 있고, 대신 밤의 고독과 낮의 불안이 교대로 방문한다. 나 자신이 우선 그렇다. 돈에 쫓기며, 사무실에 고립되어 버렸다. 스스로조차 추스를 수 없으니, 작가들에게 희망이 되지 못하고 바람막이가 되지 못했다. 해결되지 않는 돈의 문제는 터부가 되어 묵직하게 마음 깊은 곳에 가라앉아, 어딘가 있는 구멍을 딱 막아 버렸다. 전원이 꺼진 기계처럼 무기력하게 정지되어 버렸다. 불안한 손가락만 하루내 인터넷을 떠돌았다.

고통 속에서 내가 욕망했던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 세계 너머는 폐허가 아니라 그 벽이 감추고 있던 다른 세계를 드러낸다. 이 이면의 세계는 고통과 함께 찾아오지만 동시에 어떤 기쁨을 준다. 그것은 삶의 실재를 맛본다는 것이다. 익숙한 상징계의 질서들 너머, 의식에 떠오르지 않던 삶의 진면목이 무너지는 세계와 함께 떠오른다. 그리고 거기서 빛나는 진실들이 숨겨져 있음을 안다. 역설적이게도 삶이 붕괴되었을 때 그렇다.

작가로 산다는 것은 상징계의 외곽을 거닐며, 외부와 내부를 더 자주 민감하게 오가고 그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진실이 그저 예술가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정도 차가 있을지 모르지만, 공유되는 것이리라 믿는다.

어둠이 내렸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버텨 가고, 또 만족하며 나아가고 있는 작가들에게 성원을 보낸다. 저 산 너머 너의 빛이 있음을 알기에, 내 작업실에도 불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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