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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기고] 물도 인권이다 / 김희진

등록 2011-03-21 20:21

김희진
김희진
김희진
국제앰네스티 사무국장
연일 일본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뉴스 중 아직도 도움을 기다리거나 대피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본다. 물이 부족하다, 화장실에 갈 수 없다는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보며 내가 그 상황에 있다면 어떨까 두려워진다. 이들에게는 이 문제가 언젠가 해결될 것이며 본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런 희망조차 할 수 없는 수억명의 사람들로 가득하다.

아프리카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 인구의 절반이 ‘키베라’라는 슬럼에 산다. 나이로비시 상수도위원회의 2009년 조사 결과를 보면 키베라에서 집에 화장실이 있는 가정이 24%에 그쳤다. 나머지 사람들은 오전 8시부터 밤 10시까지 1회 이용할 때 약 30~70원(2~5케냐실링)을 내야 하는 공중화장실을 이용한다.

키베라 사람들에게 집에 화장실이 없다는 것은 단지 ‘불편함’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화장실 한번 가기 위해 15분을 걸어가야 하는 사람들, 특히 여성들에게는 늦은 밤 화장실에 가는 것이 ‘두려움’ 혹은 ‘공포’이다. 치안이 불안해 밤에 밖을 나갈 경우 성폭력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물이 부족하다는 것이 위험한 사회로 연결되는 지점이다.

빈곤한 사람들이 물과 위생시설에 접근할 수 없는 문제는 비단 아프리카만의 문제가 아니다. 유럽 전역에서 로마족(집시)은 사회적 차별 속에 물을 얻기 힘든 경우가 많다. 유럽연합(EU) 가입국인 슬로베니아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안전한 식수를 얻는 데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전기는 물론 상수도조차 없는 지역에 살고 있는 로마족은 물을 얻기 위해 더러운 하천으로 가야 한다. 슬로베니아 도시민의 하루 평균 물 사용량이 적게는 150리터에서 많게는 300리터에 달하지만 로마족은 10~20리터로 근근이 버티는 경우가 허다하다.

깨끗한 물에 접근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은 빈곤한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 안전하지 못한 식수는 단순 배탈부터 콜레라까지 다양한 수인성 질병을 유발하고, 이를 위한 치료비는 빈곤한 로마족 가정의 생계를 위협한다. 아픈 아이들은 학교에 가기 힘들며 가더라도 씻지 못해 냄새가 난다며 따돌림을 받아 학교 가기를 포기하게 된다.

집안에 화장실이 있었더라면 케냐 여성들은 성폭력의 위험을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족이 깨끗한 물을 얻을 수 있었다면 가족들이 아프거나 아이들이 학교에서 놀림 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물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화장실과 세면시설 등 기본적인 위생시설 없이는 존엄한 삶을 유지하기 어렵다. 케냐와 슬로베니아 사례에서 보듯 물 부족은 차별받고 소외되는 것의 이유이자 결과이다. 물은 그냥 물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권리, 바로 인권이다.

지난해 9월 유엔인권이사회에서는 “물과 위생시설을 누릴 수 있는 권리는 적절한 삶의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권리에서 유래한다”고 밝히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미 2006년 아프리카-남아메리카 정상회의나 2007년의 아시아태평양정상회의에서도 물이 인권임을 천명한 바 있다. 각국 정부는 슬럼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오랫동안 차별받아온 집단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들이 겪고 있는 인권침해를 더는 외면해서는 안 된다.

3월22일은 물의 소중함을 알리기 위해 제정된 세계 물의 날이다. 물은 소중한 만큼 인간의 삶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다. 얼마 전 구제역으로 인한 물 오염의 공포로 떠들썩했던 경험을 한 터라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세계의 물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이제 사막화 등으로 인한 전세계적 ‘물 부족’ 문제를 고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랜 기간 물로 인해 차별받아왔던 지구촌 수억명의 사람들의 목소리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물 문제를 풀어가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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