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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방사능보다 무서운 것 / 조홍섭

등록 2011-03-31 19:50수정 2011-03-31 19:54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1986년 체르노빌 사고 직후 국내 원전 여러 곳의 격납용기 안에까지 들어가 보는 드문 취재 기회를 얻었다. 우리 원전의 안전성을 직접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원전은 ‘다중 안전장치’를 갖춰 절대 안전하다며 한 기술자가 들려준 비유가 인상깊었다. 내일 아침 아주 중요한 약속이 있을 때 머리맡에는 전자식 자명종을, 발치에는 태엽식 자명종을 놓아 만일의 사태에도 반드시 하나는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다중 안전이란 설명이었다.

그런데 지각한 경험을 돌이켜 보니, 대개 알람이 작동하지 않은 게 아니라 알람을 끄고 다시 잔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었다. 사람에겐 공학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실제로 체르노빌과 스리마일섬 사고를 일으킨 결정적 요인 가운데는 설계에 따라 자동으로 작동하려던 안전장치를 작업자가 판단착오나 실수로 억지로 멈춘 것이 포함돼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태가 장기화, 광역화 조짐을 보인다. 다른 재해와 달리 원전 사고는 시간이 지나도 사태가 쉽사리 진정되지 않는다. 반감기가 짧은 요오드131 등이 붕괴하면서 방사능은 40일이 지나면 처음의 10분의 1로 줄어들지만 이후에는 반감기가 30년인 세슘137 등이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방사능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원전 안에는 많은 양의 방사성 물질이 들어 있어, 후쿠시마 원전처럼 핵연료가 녹아내리는 사고가 나면 수명이 긴 방사성 물질은 두고두고 오염을 일으킨다. 체르노빌 사고 때 방출된 세슘137의 총량은 1980년까지 대기권 핵실험으로 내보낸 양을 모두 합친 것보다 20배나 많았다.

이제 우리는 몇 주가 될지 몇 달이 될지 모르는 방사능 공포 속에서 살게 됐다. 이런 불안을 부추기는 건 인터넷도 언론도 아닌 ‘절대 안전’만을 되뇌는 정부와 원자력 전문가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관해서는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너무 많다. 기본적으로 어떤 방사성 물질이 얼마나 누출됐는지도 잘 모른다. 그런데도 절대로 안전하다고 얘기하는 전문가를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아직 극미량에 그친다는 당국의 방사선 측정치를 믿지 못하겠다는 게 아니다. 과학적 측정과 예측의 불확실성을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원전의 안전만을 감싸려는 태도가 신뢰를 잃게 만든다는 것이다. 요오드와 세슘이 전국에서 검출됐을 때 중요한 건 ‘극미량’이 아니라 ‘검출됐다’는 사실이다.

방사능이 대량 누출되는 최악의 사태가 오더라도 피폭 허용치에 못 미친다는 원자력안전기술원의 시뮬레이션도 순진하기 짝이 없다. 제논(크세논) 검출에서 보듯 자연이 그렇게 예상한 대로 움직일지도 의문이지만, 그렇게 큰소리치다가 조금이라도 예상과 다른 오염이 벌어졌을 때 촉발될 시민들의 공포는 어쩔 것인가.


이 기관의 누리집에는 불안한 시민들의 문의가 빗발치는데, 답변을 보면 “의료방사선이나 인공방사선이 모두 같은 것”이고 “방사능은 귀하의 몸속에도 주택에도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다”는 등 방사선 안전을 책임지는 기관의 태도라고 믿기 힘들다. 기술자의 눈에는 모든 방사선이 같을지 몰라도, 어떻게 더 큰 위험을 막기 위해 의사의 관리 아래 자신이 선택해 쪼이는 의료용 방사선과 사고로 무차별적으로 노출되는 원전 방사능이 같단 말인가.

국내 원전에 대한 전면 안전점검도 미덥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불과 한 달 동안 전국의 원전 21기를 점검하면서 김황식 국무총리는 “원전을 새로 재설계한다는 각오로 충실히 하라”고 지시했다. 이런 말잔치와 달리 유럽연합은 원전이 자연재해나 테러에 취약한지 점검하는 ‘스트레스 테스트’를 연말까지 한다.

후쿠시마 원전에서 지금까지 방사선에 의한 급성질환으로 숨진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러나 방사능 오염 지역으로 낙인찍힌 후쿠시마 인근에서 농사짓고 어업을 하며 살아온 수십만명의 주민들에겐 이미 사형선고가 내려진 것이나 다름없다. 방사능 자체보다 그 사회·경제적 파장이 더 무서울 수 있다.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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