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원 작가·영화평론가
평상시 딱히 표준어의 수호자스러운 행태를 보이지 않는데다, 오히려 파괴자라는 얘기를 들을 때가 훨씬 많은 필자인지라 이러쿵저러쿵할 처지가 못 되긴 하지만, 그래도 일단은 글을 써서 먹고사는지라 가끔은 말에 신경을 쓰게 될 때가 있다. 특히 요즘의 존댓말 인플레이션 같은 이상현상을 자주 접할 때 그렇다.
존댓말 인플레이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손님을 높이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한 일부 점원들이, 손님이 사려는 물건부터 내는 돈까지 깡그리 높여 부르는 현상을 일컬음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이 모델은 분홍색만 있으시고요, 파란색으로 나오신 모델은 저희 매장에는 없으시지만, 주문하시면 3일 내로 보내드리실 수가 있으신데, 택배비용이 따로 나오시지는 않으시고요.” 이는 최근 필자가 실제로 접한 사례로서, 투철한 서비스 정신의 폭포수를 직면한 필자는 채 5분도 못 돼 그 매장을 빠져나와 높은 곳으로 대피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어떻게 이리 만연케 됐을까? 필자의 가설은 이렇다. ①점원도 24시간 매장 직원일 수는 없다. 즉 직장을 벗어나 다른 매장에 가면 그(녀) 역시 고객의 처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②그(녀)는, 점원 중 누군가가 그러한 신개념의 존댓말을 쓰는 것을 듣는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친다. 앗, 이제껏 내가 쓰고 있는 존댓말은 너무 약했어. 그래, 최소한 저 정도는 해줘야 진정한 존댓말의 세계라 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③그(녀)는 출근 후 또다른 점원을 고객으로 맞이하고 기타 등등.
최근 격심한 물가상승 추세에 발맞추듯 사회 전반에 나타나고 있는 언어 인플레의 발생 과정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본다. ‘저탄소 녹색성장’부터 ‘하나되는 대한민국’까지, ‘질쏘냐 정신’에 입각해 경쟁적으로 남발되는 특정 용어들의 면면은 실로 다양하다만, 이들 중 선두를 달리는 것은 단연 ‘스마트’다. 스마트 폰, 스마트 티브이, 스마트 카, 스마트 워터, 스마트 슈즈 등등, 스마트라는 단어를 붙이지 않으면 공산품안전관리법에 의한 품질표시 위반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스마트가 범람한다. 어느 날 갑자기 스마트 김치나 스마트 연탄 같은 걸 마주쳐도 전혀 놀랍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과연 이리도 많은 각종 스마트들이 우리를 정말 스마트하게 해주고 있는 걸까? 물론 혁명이라고까지 불리는 스마트폰의 등장이 이제껏 불가능했던 많은 것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능성은 그것을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이들에게 분명 혁명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일상이, 두 배가 넘게 훌쩍 뛰어버리는 통신비용을 감내하며 설익은 기술들의 베타테스트에 기꺼이 자원해야 할 정도로 이 휴대용 피시를 갈망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의문이 든다. 오히려 높아진 통신비용에 걸맞은 쓸모를 찾아내기 위해, 본래 ‘가전제품 같은 컴퓨터’를 지향했던 이 기계를 ‘공부’하기 위한 학원까지 생기는 것이 이른바 스마트 혁명의 또다른 단면이 아닌가.
전자기기가 사람에게 자신의 스마트함을 증명하는 대신, 사람이 전자기기로 자신의 스마트함을 증명하려는 시대. 그것이 스마트 시대라면 우리는 과연 그 스마트란 단어가 스마트하다 단언할 수 있을 것인가.
상대도, 본인도, 물건도, 택배도, 통합 패키지로 높여버리는 존댓말이 결국 아무것도 존대하지 못하는 텅 빈 언어가 되어버리는 그 원리로, 어디에나 붙어 있는 스마트는 결국 아무것도 스마트하게 만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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