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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기고] 서남표 총장은 실패했다 / 진상원

등록 2011-04-08 19:16

진상원 카이스트 수리과학과 박사과정·전 대학원총학생회장
진상원 카이스트 수리과학과 박사과정·전 대학원총학생회장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에 서남표 총장이 처음 오던 날, 그는 이런 약속을 했다. 여러분의 의견과 우려를 적극적으로 듣고 아이디어를 지원하겠다고. 그러던 그가 학부 교육을 혁신하겠다고 했다. 학점 0.01점당 6만3000원이라는 유례없는 등록금 제도를 도입했다. 그는 책임감을 고취하기 위해 필요한 제도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표시했고 재고를 요청했지만, 그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세계적인 대학이 되기 위해서라며 영어강의를 도입했을 때 또다시 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나타냈다. 영어강의로는 전공지식을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듣지 않았다. 몇몇 학생의 항의에, 보직에 있던 교수는 이렇게 답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도 영어로 가르친다. 우리도 엠아이티처럼 되려면 영어로 가르쳐야 한다.”

몇몇 학생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였지만 서 총장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교육방송> 인터뷰에서 학생들의 말은 잘 몰라서 하는 말이고 들을 가치가 없다고 일축했다.

이런 내부 사정에는 관계없이 언론은 환호했다. 대학 교육의 개혁가, 철밥통의 파괴자…. 서남표 총장의 행보 하나하나에 주목했고 긍정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그는 한국 교육의 아이콘이었다. 내부 사람들이 외치는 목소리는 개혁에 반대하는 철밥통들의 목소리로 묘사됐다. ‘서남표식’ 개혁에 우려를 표하는 학생들의 목소리는 철부지들의 징징거림으로, 교수들의 목소리는 철밥통을 지키기 위한 배부른 타령으로 변질됐다. 그렇게 처음의 약속은 휴짓조각이 됐다.

융합학문과 창의성을 장려한다고 했지만, 경쟁적인 환경에서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를 살 수밖에 없는 학생들에게 그건 정말 사치스러운 일이 됐다. 성적이 떨어지면 돈을 내야 한다. 상대평가 시스템에서 학생들의 4분의 1은 항상 돈을 내게 돼 있다. 성적을 잘 받기 위한 공부를 하다 보니 인접 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다른 학과의 강의를 듣는 건 정말 큰 모험일 수밖에 없다.

학생들은 공부하고 싶은 과목보다 학점을 잘 주는 강의를 찾게 됐다. 잘 모르는 것을 배우기보다 잘 아는 것을 반복하게 됐다. 꿈을 찾아서 현실적인 요소는 무시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에 뛰어들었던 학생들은 징벌적 수업료라는 폭탄 앞에서, “도대체 학교를 어떻게 다녔길래 안 내던 돈을 내라고 하는 거냐?”는 가족의 걱정 앞에서 할 말을 잃는다.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허깨비와 싸우면서 방학을 보내고 나면, 이제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도 깨닫지 못한 채 어렸을 때의 꿈을 간직하고 다시 도전하는 학생에게 학교는 또다시 현실의 준엄한 철퇴를 내린다. 장짤(국가 이공계 장학금을 못 받게 되는 것을 학생들이 일컫는 말), 그리고 수업료.

서남표 총장의 정책은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경쟁. 세계적인 연구자들은 경쟁을 통해서 만들어진다며 교수들에게 경쟁을 도입했다. 이른바 ‘순위’라는 것에 학교 그 자체도 맹렬하게 경쟁한다. 학생들에게도 경쟁을 시켰다. 무한 경쟁. 다 잘하면 다 같이 잘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잘해도 4분의 1은 탈락하는 경쟁.

벼랑 끝까지 몰린 학생이 자살을 택했을 때도 서 총장은 말했다. 안타깝지만 나는 잘못한 게 없다고. 두번째 학생의 자살에도 그는 외면했다. 세번째 자살이 발생했을 때는 오히려 학생들의 나약한 정신을 질타했다. 네번째 자살이 발생하자 그제야 머리 숙여 사과한다.

서남표 총장은 많은 업적을 남겼다. 카이스트는 그가 온 뒤 많은 건물을 지었고, 많은 정부 예산을 확보했으며, 많은 기부금을 모았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큰 성과라고 한다.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그 건물, 그 돈은 서남표 총장에게 “한국 과학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를 키워 주십시오” 하고 투자한 건물과 돈이다. 그리고 서남표 총장은 실패했다.

진상원 카이스트 수리과학과 박사과정·전 대학원총학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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