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철 esc팀장
경기도 고양시 일산 변두리로 이사온 지 1년이 조금 넘었다. 몇년 전 오가다 우연히 목격한, 나지막한 집들을 넘어서는 풍성한 나무에 반한 터였다. 시야를 막는 높다란 아파트와 빌딩이 없고 봄이면 앞다퉈 피어나는 색색의 꽃들이 아름답다. 널찍한 길가에는 아름드리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가로수가 만들어낸 한여름 짙푸른 녹음도, 가을바람에 우르르 몰려다니는 낙엽 무리도, 한겨울 눈 덮인 나무의 포근한 서늘함도 모두 좋았다.
각색 꽃들이 망울을 틔우는 이즈음, 그 거리에서 망연했다. 겨우내 헐벗은 플라타너스는 흉물스럽게 변해 있었다. 플라타너스의 굵은 가지들은 전동톱의 날선 위용 앞에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화려하게 재기하려던 플라타너스의 꿈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황사로 뿌연 하늘 아래, 전봇대처럼 보이는 플라타너스가 있고 그 곁에서 초등학생들은 방사능비를 피해 입가리개를 하고 우산을 들고 있었다.
전지공사라고 했다. 우리말로 가지치기다. 봄이 올 즈음 여름을 대비해 미리 가지를 정리해둬야 나무가 더 잘 자란다고 한다. 나무가 너무 웃자라 신호등과 교통표지판을 가리는 것도 방지해야 한다. 플라타너스는 자라나는 속도가 빠른 축에 든다. 가게 주인들은 가로수 그늘 아래 자기 집 간판이 가려진다고 아우성이다. 봄마다 날리는 플라타너스 씨털은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꽃가루로 오해받기도 한다. 능지처참을 당한 플라타너스의 밤거리엔 노란 신호등이 깜빡인다. 검은색 중대형 승용차들이 줄줄이 멈춰 선 길가에 카페라는 이름의 술집들이 어깨를 겯고 네온사인 무지갯빛 색등을 빛낸다. 그 곁에서 허옇게 군데군데 각질을 벗는 플라타너스들은 팔다리 잘린 몰개성의 모양새로 서 있다.
한여름의 플라타너스 같아야 할 젊은이가 목숨을 내던졌다. 드높은 아파트 위에서, 웅장한 대학 건물 안에서, 화려한 도시의 거리 곳곳에서 삶을 포기당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누군가에게 “죄송하다”며 이생을 떠났다. 숱한 젊은이들이 이미 멀리까지 가 있다. 비싼 학비를 빚내고도 취업의 희망은 희미하다. 어렵게 등수 안에 들어도 찬바람은 그들을 안온하게 놔두지 않는다. 그들은 머잖아 가지치기 당하리라는 불길한 짐작 속에 마른버짐 핀 꺼칠한 얼굴로 떨고 있다. 카이스트의 자살들과 중앙대의 무기정학이 이어져 있고, 홍익대의 청소노동자, 서울대의 법인화가 무관치 않다. 고려대·이화여대·서강대·덕성여대 등의 등록금 문제가 다르지 않다. 팔다리 잘린 채 생존경쟁에 내던져진 그들은 뛰기 위해 사는지, 살기 위해 뛰는지 헷갈려한다.
목잘린 플라타너스의 거리는 <세한도>의 광경을 닮았다. 완당이 제주에서 귀양살며 홀로 푸른 소나무의 황막함을 새겼던 그 마음을 다시 새긴다. 춘래불사춘의 계절, 그럼에도 젊은 그들은 봄을 기다린다. 돈이 인간을 넘어서지 못하는 세상, 탐욕이 생명을 앗아가지 못할 나라를 꿈꾸며 그들은 오늘도 절치부심한다. 좌절과 실패를 딛고 부조리에 항거하며 같은 아픔을 꿰뚫는 통찰을 키워나간다.
아무래도 머잖아 플라타너스 잎들은 여기저기 살아날 것이다. 플라타너스는 매서운 추위에 굴하지 않고 척박하고 좁은 땅에서도 잘 자란다. 병충해도 곧잘 이겨내고 더러운 공기는 깨끗이 걸러낸다. 톱날에 잘려나간 가지들은 다시 솟아나고 가지 끝마다 연초록 작은 이파리들이 생명의 소리를 내며 자라날 것이다. 이 거리에 다시 널따란 잎들이 뜨거운 해를 받아 빛날 것이다. 그리하여 여름 뙤약볕 너머, 그들에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릴 것이다. nowhere@hani.co.kr
김진철 esc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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