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구 배재대 일본학과 교수
대전에 있는 카이스트 학생 4명의 잇따른 자살을 계기로 이른바 ‘서남표식 대학개혁’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글들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자살의 가장 큰 원인이 강도 높은 경쟁 중심의 학교 개혁이라고 언급하지만, 나는 이 원인 외에 우리나라 대학들이 대학 서열화에 과부하가 걸릴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점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그 반응이란 것이 <더 타임스>의 세계 대학평가 순위와 <중앙일보>의 우리나라 대학평가 순위이다. 서남표식 개혁 역시 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더 타임스>는 영국에서 평가하는 방법이니 그렇다 치고, <중앙일보>의 경우 1994년 이후 올해까지 모두 4개 부문(교육여건 및 재정, 국제화, 교수연구, 평판 및 사회진출도) 33개의 지표로 평가를 하고 있는데, 과연 이런 평가가 바른 평가인지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즉, 이러한 정량적 평가 이외의 정성적 평가는 어떻게 측정하는지, 그리고 대학의 교육이란 본질적인 요소 이외의 외적인 부분에서 대학간 경쟁을 부추긴 평가방법에 문제점은 없는지에 대한 고민이 그것이다. 평가라는 잣대로서는 질적인 평가보다 양적인 평가가 단연코 쉬우면서도 간단하기 때문에 이에 경도된 측정이 될 가능성이 높다. 대학평가가 수치화되어 한국 특유의 서열화에 노출되다 보니 경쟁사회에 내몰리고 있는 대학 구성원 모두가 끊임없는 피로감을 느낀다. 그러니 문제점은 조금만 생각하면 셀 수 없이 많이 드러난다.
예를 들면 수능 상위권 학생을 입학시켜 졸업시키고 있는 이른바 명문대학과 비교하여 볼 때, 중위권 혹은 중하위권 학생들을 잘 가르쳐 상위권 학생으로 졸업시키는 대학의 점수는 평가에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단연코 달라야 한다. 학생들에게 문학·역사·철학(文史哲)을 읽혀 잠재적인 학문적 소양을 갖추어 졸업시키기 위한 대학의 철학 역시 평가에 반영되지 않는다. 학생 진로에 있어서 취직률과 사회적 인지도에 대한 평가는 있지만, 학생들에게 학문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는 지도와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구루(guru)로서의 스승의 모습은 대학교수의 연구업적에 포함되지 않는다. 신입생 엠티와 체육대회, 축제 등에 참가하여 스승과 제자의 어려운 관계를 깨뜨리기 위해 노력하는 교수의 점수는 어디에 포함시켜야 하는가? 오히려 그 시간에 <중앙일보>의 대학평가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연구실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 교수가 있다면 그 피해는 학생들에게 전이될 것이다.
대학의 국제화지수를 높이기 위한 영어강의 역시 마찬가지이다. 학생과 교수 모두 답답해한다. 없애면 될 것을 그렇게 못하는 것은 이것을 국제화의 가장 큰 잣대로 읽고 있는 한국인들의 시각 때문일 것이다.
또다른 문제는 서열화된 대학 순위를 보고 학교를 선택한 고3 학생들이 서울(수도권)에서 학교를 다닌 뒤에는 지방으로 내려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졸자들의 취업희망지역의 마지노선이 수도권 분당까지라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지역 균등발전이란 측면에서도 대학 서열화의 기준이 되는 지표를 수정하든지, 아니면 우리가 객관적으로 인정할 만한 5위까지만 공개하든지 하여, 수험생들이 대학 간판으로 미래의 진로를 선택하지 않고 전공과 지역발전을 고민하게 하는 정보 제공을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제 세월이 지나고 대학의 평가방법이 달라지면 우리나라 대학들은 다시금 수치를 높이기 위한 경쟁에 돌입할 것이다. 그때가 되어 또다시 대학 본연의 모습이 아닌 결과주의와 보여주기 위한 화장에만 골몰할 것인가? 명문대학과 더불어 지방대학을 발전시키고 지역 균등발전을 외치고 싶다면, 대학평가에서 맹목적인 대학 서열화보다는 좀더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를 위해 앞서 언급한 문제점들을 개선할 필요성이 있다.
강철구 배재대 일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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