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성 부산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요즘 우리 국민의 최대 관심사는 방사능이다. 대기업의 정리해고로 인한 전면파업 사태나 대학가의 연이은 자살 소식도 곧 방사능비가 내린다는 예보만큼 긴박하지는 않다. 경제적으로 소외되고 인간다운 삶의 가치가 추락하는 것까지는 눈 딱 감고 버텨낸다 하더라도, 당장 내 생명이 위협받는 것은 결코 용인할 수 없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불우이웃돕기 차원으로 보며 방사성 물질이 쌓여가는 환경 대신 국민들에게서 ‘불순’ 성분을 찾는 정부는 더이상 믿을 수 없으니, 국민 스스로 알아서 피폭에 대비하고 지역 재보궐선거에서도 후보자의 원전 유치 정책을 따져 묻게 된 것은 실로 자연스런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예전과는 사뭇 다르기에 놀랍다. 지역경제에 이득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인지 여태껏 원자력발전소 유치를 투표로 거부해본 적이 없는 우리 국민이다. 핵연료의 가공·재활용·재처리 권한, 이른바 ‘핵주권’을 되찾자는 일부 정치권의 주장은 국민들의 민족적 자긍심에 부응했다. 이에 일부 전문가들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권리’만을 얻어내는 게 외교상 실리적이라고 제안했지만, 이때도 핵무기 제조 의혹을 불식할 기술적 측면이 부각되었을 뿐 방사선의 위험성에 대한 논의는 전무했다. 북한 핵문제가 불거질 때도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늘 ‘안보’의 문제였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하기 바로 직전까지도 주요 언론은 해외 원자력발전소 건설사업을 수주한 대한민국이 ‘원전 강국’임을 강변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이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계기로 급변했다. 갑작스레 핵의 위험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고 대체에너지 개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핵의 문제가 이제 경제적 효용이나 국익, 혹은 안보의 차원을 넘어 다루어지게 된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국가 정책적 논의에 갇혀 있어 안타깝다. 이번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단지 정책상 실패의 산물만은 아니었다. 논란을 빚은 어느 목사 말처럼 신을 공경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 경시가 불러온 재앙이었다.
해마다 8월6일이 되면 일본 히로시마에서는 1945년 원폭에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강가에 종이학을 띄운다. 무고한 시민의 희생을 앞세운 히로시마식 반핵평화주의는 일견 보편적 인간애에 호소하는 듯 보이지만 현실은 판이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피폭된 전체 희생자 중 대략 10%는 한국인이다. 이들은 강제징용으로 끌려갔거나 일제 치하에서 먹고살 길이 없어 현해탄을 건너간 농민들이었는데, 이들 중 겨우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은 일본인 피폭자에게 제공되는 모든 국가적·사회적 혜택으로부터 철저히 배제되었다. 히로시마의 반핵평화주의가 정녕 인간 생명의 존엄함을 기반으로 삼았다면, 어찌 ‘유일한 피폭국가 일본’이라는 신화를 조장함으로써 과거사의 책임을 회피하는 데 일조할 수 있었을까? 허울 좋은 반핵평화주의로 무장한 ‘유일한 피폭국가’는 결국 자연스레 ‘원전 강국’의 길로 나아갔다.
히로시마에서 피폭된 한국인 중 많은 사람이 경남 합천 출신이었다. 일본에서 배척받고 가난에 찌든 고향땅으로 되돌아온 이들은 평생 아무런 사회적 보호망 없이 가난과 병고에 지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들의 삶을 가장 피폐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병든 자식들이었다. 방사선의 영향에 의한 유전병이 상당수의 2세들, 심지어 3세들의 삶까지도 유린하고 있다. 여태껏 일본과 미국, 그리고 한국 정부는 모두 방사선과 유전병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나, 이는 과학적 근거보다는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이다. 세 나라 모두 피폭자의 존재가 원전 강국의 길에 걸림돌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핵과 원전 문제의 본질은 인권이다. 무엇보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지켜나갈 길을 찾는 문제이다. 이렇게 볼 때, 대체에너지의 모색과 피폭자의 사회적 보호, 그리고 끊임없이 생명을 앗아가는 노동과 교육의 현실에 대한 진단은 그리 외딴 일이 아니다.
전진성 부산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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