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식 한국방송대 명예교수
“3·15 부정선거 다시 하라.” “대한민국의 생명선은 대법원에 달려 있다.”
이 구호들은 1960년 4월19일 우리 대학생들이 거리시위 도중 외치던 것들이다. 당시 이승만 정권의 선거부정이 너무 심했고, 그것이 대법원에 제소되었기에 나온 구호들이다. 나는 당시 푸릇푸릇한 대학 2년생으로서 시위에 직접 참가했다. 그때 이 구호들을 앞세우고 우리는 서울대 문리대가 있던 지금의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종로 쪽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이화동 네거리에서 경찰의 저지로 더 전진을 못했고, 여기서 나는 경찰들의 곤봉에 무수히 맞고 쓰러지다시피 옆으로 밀려났다. 어떤 학생들은 머리가 터져 피가 흐르기도 했고, 넘어져 차이고 밟히기도 했고, 끌려가기도 했다. 이 와중에 우리 몇은 법과대학생들의 지원을 얻고자 그곳 도서관 2층으로 빠져 올라가 독재와 함께 싸우자고 마구 외치기도 했다. 많이들 호응했다. 의대생들은 흰 가운을 입은 채 달려와 부상자들을 치료했다.
후문이지만, 이날 이와 비슷한 일들이 다른 대학들에서도 있었고, 수만인지 수십만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많은 학생들이 누구의 지시도 없이 시청 앞과 광화문 일대에 모여들었다고 한다. 당시 이런 민심이 하늘의 뜻이었다고 나중에 느꼈지만, 이날이 결국 한국 사상 성공한 최초의 민중혁명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그 대가는 적지 않아서, 많은 젊은 목숨이 경찰의 총격에 희생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사망자 185명, 부상자 1196명이었다.
지금도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하나는 4월25일 “정부는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백발이 성성한 노교수들의 인상적인 시위이고, 또 하나는 이승만 동상을 무너뜨리고 그 목에 밧줄을 매어 종로 거리를 끌고 다니던 끔찍한 모습이다. 참으로 보기 민망하고 괴로웠지만, 이승만이 이 정도까지 사람들의 미움을 사게 된 직접적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선거에서의 온갖 부정·불법이다. 야당 후보등록의 폭력적 방해, 공개투표 강요, 유령 유권자 조작, 야당 참관인 축출 등등. 이도 모자라 개표 통계조작까지 했다. 이뿐 아니라, 그 이전부터 사실은 불법적 개헌도 몇 차례 강행해 종신집권을 꾀했다.
해방공간에서의 김구 암살과 정적 조봉암 사형(조봉암은 얼마 전 대법원의 무죄 확정판결이 났다) 등에도 그가 간여한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이제는 만천하에 밝혀지지 않았던가. 무엇보다 그가 대한민국 역사에 길이 상처를 남긴 것은, 35년간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강탈해 가던 일제를 신주 모시듯 하던 친일파들을 처단하고자 정부 수립 직후 국가적으로 만든 ‘반민특위’를 해체해버렸다는 사실이다. 용납 안 되는 일이다.
첨언해둘 것은, 국가 보위에 무한적·최종적 책임이 있는 대통령으로서 이승만은 6·25 발발에도 책임의 일단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김일성의 책임이 더 크고 무겁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당시 미국의 극동방위선 ‘애치슨라인’이 한국을 제외했을 때 우리 쪽에서 미군 없는 독자의 방위계획이나 유사시 미국이나 연합국의 원조를 받는 계획안을 만들어 발표라도 했다면 김일성이 함부로 쳐내려오지는 못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이승만이 뛰어난 지도자였다면 이런 미래사를 꿰뚫는 혜안이 있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그는 초대 대통령으로서 물론 공도 크지만 이처럼 과가 더 많아 우리가 길이 추앙할 인물은 못 된다는 것이 나 개인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에 관한 기억이 이처럼 생생한데, 요즘 와서 일부 사람들이 그를 ‘건국 대통령’ 운운하며 찬양한다. 이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명기된 4·19 정신의 모독이요, 배반이요, 도전이다. 나아가 한국민 민주역량의 부인이요, 4·19 영령들에 대한 모욕이다. 아니 생존해 있는 그 유족과 부상자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봤는지 모르겠다.
윤용식 한국방송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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