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영무 논설위원
내 직장이 좋은지 보수나 안정성, 장래성을 따져 말할 수도 있지만 더 간명한 기준이 있다. 자녀가 이 회사에 들어왔으면 하는가다. 나는 비록 감수하고 살았지만 자녀만큼은 험한 꼴 겪지 않고 보람있게 살기를 누구나 바란다. 괜찮은 일자리가 줄어드는 현실에서 이런 희망은 물론 사치에 가깝다. 그런데 이렇게 물어보면 남 보기에 번듯한 직업을 가진 이들도 내 자식만큼은 이 일을 시키고 싶지 않다고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현대차 노조가 자녀를 우선 채용해 달라는 요구를 표결 끝에 노사협상 테이블에 올리기로 했다. 현대차를 세계적 기업으로 키우는 데 노동자들이 기여한 만큼 직원을 새로 뽑을 때 정년퇴직자와 25년 장기근속자 자녀에게 가산점을 달라고 한다. 현대차 조합원이 4만5000명인데 그렇게 되면 지난해 기준으로 자녀 채용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장기근속자는 200명, 2018년에는 1000명이 넘을 것이라고 한다.
현대차는 ‘오른쪽 바퀴는 정규직, 왼쪽 바퀴는 비정규직’이라는 말 그대로 정규직·비정규직 문제의 뜨거운 현장이다. 8000여명의 사내하청 노동자는 정규직에 견줘 60% 수준의 낮은 임금과 고용불안에 시달리면서도 정규직의 꿈은 요원하다. 대법원이 지난해 7월 비정규직 하청노동자를 직접 고용하라는 판결을 내렸지만, 회사는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되레 노조 탈퇴 압박에 무더기 징계로 고통을 받고 있다. 비정규직 노조가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파업을 벌일 때 이경훈 위원장이 이끄는 정규직 노조는 동참하지 않았다.
비정규직 노조는 참담하다. 단체협약안에는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 철폐와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항목도 있지만, 정규직의 기득권을 지키겠다는 뜻이 앞서기 때문이다. 청년 일자리 문제가 심각해 바깥의 시선도 따갑다. 불평등이 고착화하는 평등지향의 사회에서 대물림은 민감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어느 노동 전문가는 노조 지도부가 판단력을 상실했다고 지적했다. 현대차 노조 안팎의 온도차는 요즘 일교차보다 훨씬 크다.
사실 기아차, 한국지엠을 비롯한 많은 기업들이 장기근속자 자녀에게 혜택을 주고 있다. 기업을 벗어나서는 어떤 보호와 보장도 받을 수 없는 조건 속에서 노동조합이 목록에 넣고 싶은 유혹이 큰 항목이어서 현대차 노조만 탓할 순 없다. 정규직에서 탈락하면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우리 노동시장의 불안이 ‘가족임금’을 요구하게 한 배경이다. 한국지엠 노조 관계자는 “일본 지진으로 부품 조달이 어려워 2주 동안 공장이 정상 운영되지 못했을 때 조합원들이 엄청 불안해했다”고 한다.
현대차 노조에 화살이 쏠리는 것은 ‘현대차 너마저’ 하는 절박감 때문이다. 노동귀족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기도 하지만 현대차 노조는 그나마 비정규직을 지원해왔으며 전반적인 노동 현실을 개선하는 데 보루 구실을 할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정의를 묻는 책이 100만권 넘게 팔리고 공개 오디션이 큰 인기를 끄는 것은 공정성에 대한 열망이 비등 수위라는 뜻이다. 현대차 노조는 사회적 책임성에 눈을 감았다. 오늘의 현대차를 만든 주인공은 정규직 노동자뿐 아니다. 사내 하도급 노동자들의 노력과 희생이 뒷받침됐으며 이들의 처우 개선과 고용안정부터 우선 생각해야 한다.
노동조합은 정의의 칼과 기득권의 이해라는 두 얼굴을 갖고 있다.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임금 불평등을 줄여 산업 민주주의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소수 조합원의 기득권을 방어하는 보수적 조직이기도 하다. 현대중공업 노조처럼 돈으로 평화를 사서 노동의 침묵으로 들어설 것인가, 다시 비정규직을 비롯한 노동자에게 희망의 불을 지필 것인가. 현대차 노조 앞의 갈림길이다. 현대차 노조는 자녀 채용을 비정규직 정규직화의 지렛대로 활용하는 통큰 결단을 해야 한다. 노조가 사회적 지지를 받고 사는 길이다. 정영무 논설위원 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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