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석 동국대 교수·정치학
“우리가 만약 이 계약을 파기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주저하지 마시고 파면하십시오. 이것이 국민에게 올리는 우리 당의 진심 어린 결단입니다.” 1994년 미국 공화당 지도부는 선거를 앞두고 ‘미국과의 계약’이란 선언문을 공포하였다. 이 문건은 다수당이 되면 중점적으로 추진할 공약 10개를 적시했으며, 시행 시기도 의회 개원 뒤 100일 안으로 못박았다. ‘선거 공약’을 넘어 유권자와의 ‘계약’을 표방한 이 문건은 기획부터 공화당의 승리를 위한 전략적 고려가 깊게 반영되어 있다. 내용 중 상당부분이 미국민의 폭넓은 존경을 받는 레이건 전 대통령의 1985년 국정연설 문장을 그대로 활용하였다. 정책공약은 면밀한 여론조사를 통해 사회적·도덕적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안은 배제하고 이른바 ‘60%(의 지지를 담보하는) 이슈’만 포함하였다. 그 내용과 실행 방안은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이 맡았다. 결국 공화당은 40년간의 만년야당 지위를 털어버리며 의회 다수당이 되었다. ‘미국과의 계약’은 클린턴 행정부를 수세로 몰아넣었고, 공화당이 국내 정치를 장악하는 동력이 되었다.
4·27 재보궐선거와 그 이후 대선정국을 놓고 정치권의 열기가 뜨겁다. 민주당과 야권연합은 분당·김해·강원을 두고 한나라당과의 결전을 코앞에 두고 있다. 셈법은 명확해 보인다. 손학규 대표의 분당을 출마는 한 정치평론가의 말대로 ‘꽃놀이패’일 것이다. 적지에서의 당선은 손 대표를 유력한 야권주자로 부각시킬 것이요, 낙선되더라도 명분과 실리에 비해 상처는 그다지 크지 않을 거라는 계산이다. 강원지사는 ‘이광재 동정론’에 기대고, 전체적으로는 ‘엠비-반엠비’ 구도로 몰고 가고 있다.
야권의 이런 전략이 재보선은 물론 내년 총선·대선에서도 그대로 통할까? 내년 총선은 그야말로 ‘엠비 없는 선거’가 될 것이다. 여권은 대선의 유력 후보들이 중심에 설 것이다. 대단한 지지율을 바탕으로 충청·경북의 지지벨트를 견고하게 구축한 후보도, 현역 수도권 지자체장의 강점을 내세운 후보도 한나라당의 최전선에서 뛰게 될 것이다. 그에 비해 야권은 뚜렷한 대선주자가 눈에 띄지 않는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40%의 지지도를 구축하고 있지만, 야권 주자는 유시민(9.0%), 손학규(5.7%) 등 한자릿수를 맴돌고 있다.(미디어리서치 3월4일 조사) 혹자는 대선에서 일대일로 대결할 경우엔 박빙의 승부를 펼칠 것으로 보인다는 조사를 앞세워 후보간 합종연횡 혹은 야권 대연합을 강조한다.
냉정해지자. 현재의 야권이 대선후보를 앞세워 내년 총선을 치러낼 수 있는가? 4·27 재보선을 계기로 야권 주자의 지지도가 박근혜 전 대표에 견줄 만큼 눈에 띄게 뛰어오를까? 한나라당의 분란과 이를 통한 어부지리를 기다리는가? 어쩌면 야권은 지지율 두자리대의 대선주자를 하루속히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혀 있는지도 모른다. 제1야당인(아직까지는) 민주당조차 자신의 강점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지지율에서 더블, 아니 트리플 스코어 차이로 뒤지는 후보가 단일후보가 되었을 때 경쟁력을 갖는다는 것은, 민주당의 ‘셀링 포인트’가 인물이 아닌 정당일 수 있음을 뜻한다. 최근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지지율 격차는 8%로 좁혀졌다.(리얼미터 4월11일 조사) 결국 민주당은 대선후보군의 지지도를 높여서 이에 편승하는 전략 대신, 정당과 정책을 중심으로 내년 선거를 준비해야 한다.
야권은 ‘대한민국과의 계약’은 아니더라도, 분명하고 구체적인 공약과 실행 방안을 유권자에게 제시해야 한다. 박근혜의 복지담론 선점에 위기를 느끼고 부랴부랴 ‘무상 시리즈’ 공약을 앞세워 두서없는 계약서를 내미는 지도부는 곤란하다. 야권연합에 대한 논의는 무성한데, 야권연합이 유권자에게 무엇을 약속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에 대한 신뢰를 어떻게 담보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보이지 않는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산에 대한 평가와 계승의 문제도 결정하지 못했다. 여기가 바로 논의의 시작점이다.
김준석 동국대 교수·정치학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