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내가 안 해봐서 잘 모르는데…” / 김종구

등록 2011-04-25 19:58

김종구 논설위원
김종구 논설위원
이명박 대통령의 어법 중에서 가장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바로 “내가 해봐서 아는데”다. “내가 장사해봐서 아는데” “내가 배를 만들어봐서 아는데” “나도 노점상 해봐서 아는데”…. 그 경험의 폭은 한없이 광대무변해서 촉수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이런 ‘왕년의 경험’은 그가 매사에 자신감 있게 나서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대통령이 한 번도 ‘안 해본 일’과 마주하는 상황에 처하면 어떻게 될까. 4·27 재보궐선거 이후의 정국과 관련된 이야기다.

4·27 재보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안에서는 불길한 예언이 넘쳐난다. 심지어 “4·27 재보선의 결과에 따라 한나라당은 기원전, 기원후와 같은 변화를 겪을 것”이라는 선지자적 예언까지 나왔다. 선거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이런 비관적 전망이 폭주하는 것 자체가 한나라당이 이미 지는 선거를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최근에 민주당 최고위원 한 명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동석자 한 사람이 그와 손학규 대표의 라이벌 관계를 의식해 이렇게 물었다. “손 대표가 이번 재보선에서 떨어지는 것이 당신한테 유리한 것 아닌가?” 이 질문에 그는 정색을 하고 답변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러면 다 죽는다.” 이 말은 그냥 빈말만은 아닌 듯했다. 이번 선거가 민주당에 공존과 공멸의 갈림길이 될 수 있음을 직감하는 데서 오는 진지함이 있었다. 대조적으로 며칠 뒤 만난 한나라당의 한 중진의원은 재보선에 심드렁하기 짝이 없었다. “분당을에 지원유세를 나오라니까 가기는 하겠지만….” 한나라당이 의원 총동원령 등으로 안간힘을 쓰고 있는 이면에는 이런 냉소적인 풍경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부분을 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의원 몇몇의 태도가 당 전체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한나라당은 이미 정신적 패배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이번 선거 과정에서 구시대적인 색깔론이 유난히 난무하는 것도, 특임장관실의 선거개입과 강원도 불법 전화공세 등 여당의 불법·관권 선거가 전에 없이 기승을 부리는 것도 역설적으로 이런 패배적 분위기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한나라당 안에서는 ‘이번 재보선에서 지는 것이 오히려 약이 될 수 있다’는 자위의 말들도 나온다. 내년 총선·대선 등 더 큰 싸움을 앞두고 확실히 정신을 차릴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이야기다. 사실 그 말은 맞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나라당은 선거의 승패와 관계없이 이미 충분히 혼비백산한 상태다.

여당이 ‘정신을 차린다’고 말할 때는 이 대통령과의 관계 재정립도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항목이다. 한나라당이 대대적인 당 혁신에 나서든, 아니면 의원들이 알아서 각자도생의 길로 나서든 이 대통령과의 대립각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인 셈이다. 이 대통령의 경험이 아무리 넓고 풍부해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 있으니 바로 ‘레임덕 대통령’이다. 더욱이 이 대통령을 두고는 “정치적 동지는 없고 정치적 동업자만 있을 뿐”이라는 말까지 있다. 이해관계에 따라 한없이 냉정하게 등을 돌리는 것이 동업자의 생리다.

문제는 이 대통령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다. “내가 안 해봐서 잘 모르니까”라는 겸손 모드로 가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래서 당과 소통하고 지금까지와 달리 낮은 자세로 국정에 임하면 여권이나 나라 전체에 좋은 일이다. 그런데 “내가 예전에도 이런 어려움을 겪어봐서 아는데”라는 식의 또다른 ‘경험주의 철학’을 내세우면 상황은 복잡해진다. 치열한 고뇌와 천착이 수반되지 않는 ‘어설픈 앎’이야말로 여권은 물론이고 국민 모두를 피곤하게 하는 주범이다. 그런데 최근 이 대통령을 만난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대통령이 아직도 자기중심적인 자신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더라고 귀띔했다. 국민들은 임기 말 대통령을 많이 겪어봐서 잘 아는데 정작 본인만 모르는 채 4·27 재보선을 향한 시계는 째깍이고 있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