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권 논설위원
5월이다. 어느 시인은 4월이 잔인한 달이라 노래했지만, 내게 잔인한 달은 5월이다. 철모르던 고교시절 겪은 1980년 광주의 5월이 그랬고, 초년병 기자의 눈으로 지켜본 1991년 5월이 그랬다. 그 5월들을 떠올리면 땀과 눈물, 비통함과 답답함, 분노가 뒤섞인 흐릿한 영상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91년 4월26일, 등록금 인상 반대시위를 벌이던 명지대 1학년생 강경대가 경찰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머리를 맞아 숨졌다. 대학에서 ‘찬란한 봄’을 즐기지도 못한 채 열아홉 살 젊음이 스러졌고, 안타까운 분신과 죽음이 뒤를 이었다. 전남대생 박승희, 안동대생 김영균,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성균관대생 김귀정…. 그 죽음들의 의미를 기록하기 위해 최루가스에 질식한 거리에서 5월을 보냈다.
그리고 20년. 세월의 힘은 참 무섭다. 그들의 이름과 얼굴은 닳아진 책장처럼 기억 속에서 빛이 바랬다. 그저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됐다.
하지만 그냥 잊혀선 안 될 이름이 하나 있다.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 그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역사의 분수령으로 내던져져 죄인이 됐다. 아니 죄인으로 만들어졌다. 이름하여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5월8일 김기설이 서강대 옥상에서 유서를 남기고 분신한 뒤 박홍 당시 서강대 총장은 난데없이 “배후가 있다”고 떠들었고, 검찰은 득달같이 수사에 나섰다. 그리고 전민련 동지인 강기훈을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한 인물로 지목했다. 노태우 정권은 “유서까지 대신 써주며 분신을 종용했다”고 민주화운동 세력을 매도하며 대대적인 공안정국을 조성했다. 그 공안 한파에 91년 봄의 민주화 열기는 급속도로 식어갔다. 80년 광주의 봄이 군홧발에 짓밟힌 것처럼.
강기훈은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유서를 대필하지 않았다고 절절하게 외쳤다. 하지만 그의 항변은 반향 없는 메아리였다. 92년 대법원은 살인방조 혐의로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6월의 유죄를 확정했다. 치열한 법정공방이 벌어지는 동안 이 사건은 이름을 얻었다. 바로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
1890년대 프랑스에서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가 필적 때문에 석연찮게 반역죄로 몰려 종신형을 선고받자 에밀 졸라 등 당대의 지식인들이 옹호하고 나섰던 것과 판박이였다. 정치적 신념과 양심이 삶의 동력이었을 강기훈에게, 자신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빌미가 된 어처구니없는 현실은 죽기보다 힘든 고통이었을 게다.
진실은 대법원 판결로부터 15년이 흐르고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시민사회의 진상규명 요구와 노무현 정부의 과거사 청산 노력으로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유서대필 사건의 재심을 권고했다. ‘유서를 대필했다’고 감정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김기설이 직접 유서를 작성했다’고 재감정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2009년 9월 마침내 서울고법은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강기훈은 여전히 살인을 방조한 ‘범죄자’ 신분이다. 검찰은 대법원에 “법적 평온을 깬 결정으로 재심 사유가 되지 않는다”며 즉시항고 이유서를 제출했고, 어쩐 일인지 대법원은 1년8개월째 재심 개시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있다. 검찰은 한 개인의 인간성과 양심을 정치적 목적을 위해 유린한 국가폭력을 조금도 반성하지 않았고, 법원 역시 진실을 눈감은 과오의 사죄를 머뭇거리고 있다. 그것은 강기훈을 두 번 죽이는 행위다. 강기훈의 고통이 무죄 판결이 나오더라도 완전 치유될 리는 없다. 그렇지만 재심을 통해 그가 명예를 회복하고 국가폭력의 실체를 확인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인간에 대한 예의를 회복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다. 19세기의 드레퓌스가 누명을 벗는 데 열두 해가 걸렸다. 21세기의 강기훈은 그 두 배 가까운 스무 해가 지나도록 멍에를 벗지 못하고 있다. 강기훈의 잔인한 5월은 이제 끝을 맺어야 한다. 정재권 논설위원 jjk@hani.co.kr
하지만 강기훈은 여전히 살인을 방조한 ‘범죄자’ 신분이다. 검찰은 대법원에 “법적 평온을 깬 결정으로 재심 사유가 되지 않는다”며 즉시항고 이유서를 제출했고, 어쩐 일인지 대법원은 1년8개월째 재심 개시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있다. 검찰은 한 개인의 인간성과 양심을 정치적 목적을 위해 유린한 국가폭력을 조금도 반성하지 않았고, 법원 역시 진실을 눈감은 과오의 사죄를 머뭇거리고 있다. 그것은 강기훈을 두 번 죽이는 행위다. 강기훈의 고통이 무죄 판결이 나오더라도 완전 치유될 리는 없다. 그렇지만 재심을 통해 그가 명예를 회복하고 국가폭력의 실체를 확인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인간에 대한 예의를 회복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다. 19세기의 드레퓌스가 누명을 벗는 데 열두 해가 걸렸다. 21세기의 강기훈은 그 두 배 가까운 스무 해가 지나도록 멍에를 벗지 못하고 있다. 강기훈의 잔인한 5월은 이제 끝을 맺어야 한다. 정재권 논설위원 jj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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