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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특파원 칼럼] 빈라덴 사살, 마냥 기쁠 수 없는 이유 / 권태호

등록 2011-05-05 20:01

권태호 워싱턴 특파원
권태호 워싱턴 특파원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작은 학예회가 종종 열려 가끔 학교에 간다. 아이들의 70% 이상이 백인이지만 히스패닉, 흑인, 동양인 등이 섞여 있다. “이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다름’을 자연스럽게 배우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미국의 힘 가운데 하나인 ‘다름에 대한 인정’이 우리처럼 이성적·도덕적으로 학습하고 다투지 않아도 되는 게 부러웠다.

기자생활을 하면서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일단 여러 면에 기사를 펼쳐야 한다’는 걸 자연스레 체득했다. 한국 사회는 하나의 이슈가 온 사회를 장악하고, 그래서 어떻게든 ‘내 입장’을 정해야 하는 일이 매번 일어난다. 서태지든 이지아든 둘 중 누구 편을 들어야 한다. ‘이슈 감옥’에서 탈출할 수 없는 구조다.

그런데 미국 신문을 보면, 웬만큼 큰 사건에도 하나의 이슈로 신문을 도배하는 일은 드물다. 오사마 빈라덴으로 들썩이지만, 4일치 <뉴욕 타임스>를 보면 빈라덴 소식 말고도 뉴욕 양키스 ‘캡틴’인 데릭 지터의 타격 부진을 정밀분석하는 기사가 한 면에 실렸고, 국제기사도 리비아, 이라크, 캐나다, 아이티, 일본, 타이,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곳곳에 걸쳐 있다. 우리처럼 문패를 달아 며칠 동안 여러 면에 걸쳐 하나의 뉴스를 융단폭격하는 형태는 미국 신문에선 쉽게 보기 힘들다. 그게 수준이 높아서라기보단, 각자 필요와 관심이 다르기에 언론도 다양성을 제공하고 독자들도 기사를 선택해 읽는 방식이 일반화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최근 미국에서 ‘다름’에 대한 존중이 점점 사라지고, ‘옳으냐 그르냐’식 흑백논리가 점점 무성해지고 있다. 빈라덴 사살은 그 기조를 더 강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지난 3일 들른 뉴욕의 ‘그라운드 제로’는 미국에 대한 찬양과 자랑으로 가득 찼다. 누군가 틀어놓은 <갓, 세이브 아메리카> 노래가 무한반복된다. 담장에 붙여놓은 사진과 그림 중에는 군홧발로 빈라덴의 얼굴을 짓밟아 눈이 튀어나오게 한 삽화, 자유의 여신상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빈라덴의 잘린 목을 들고 있는 컴퓨터그래픽 등이 인기를 끌었다. 빈라덴이 비무장 상태에서 사살당했다는 소식이 알려져 논란을 빚지만, 일반 미국인들 사이에선 “그래서?”라는 분위기다.

무고한 시민 3000명을 숨지게 한 빈라덴의 행동은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미국에서 애국주의가 기승하면, 다른 나라들은 호전적 애국주의인 ‘징고이즘’을 걱정한다. 미국에서 애국이 강조되기 시작한 건 2001년 9·11 테러 이후다. 각급 학교에선 아침마다 ‘나라에 대한 충성 맹세’가 메아리쳤다. 빈라덴 사살 소식 직후 그라운드 제로 앞에 모인 상당수가 20대가 된 그들이다. 대학 캠퍼스에는 남아공 월드컵 때 유행했던 부부젤라를 불고, 야구 경기에서 이겼을 때처럼 다리 위에서 연못으로 뛰어내리는 학생들이 많았다. 빈라덴 사살은 그렇게 소비됐다.

1960~70년대 대학생이었던 부모세대는 베트남전 앞에서 반전과 반공 등 복잡한 양면심리(앰비벌런스·ambivalence)를 겪었다. 이는 상대주의를 통한 다양성 강화와, 다른 한편으론 외국에 대한 무관심과 고립주의라는 두 가지 방향으로 흘러 9·11 이전까지의 미국을 특징지었다. 그러나 지금 빈라덴의 죽음 앞에 선 미국 20대에게 그런 양면심리를 찾긴 힘들다. 한 방향 ‘축제’만 있을 뿐이다. 이라크전이 허상임이 드러났지만 미국에서 양심의 목소리가 베트남전 때처럼 들리지 않았던 건 9·11의 그림자가 너무 짙었기 때문이다. 미국 20대들은 후세인에 이어 빈라덴이 처형·사살되는 걸 보며 자랐다. 미국에 덤비면 어떻게 된다는 걸 배웠다. 앞으로 미국 사회를 이들이 이끈다.

9·11의 슬픔과 빈라덴 사살의 기쁨이 중첩된 그라운드 제로에서 나는 기쁘지 않았다. 권태호 워싱턴 특파원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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