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빈 논설위원
한편의 좋은 블랙코미디는 배꼽을 잡고 웃는 사이 불안과 부조리를 깨닫게 한다. 뒤끝이 오래가고 쓰다는 점에서 비극과 같다. 미국 코미디계의 거장 멜 브룩스는 비극과 코미디의 차이를 이렇게 정의했다. “내 손이 칼에 베이면 비극, 모르는 사람이 길을 가다 뚜껑이 열린 하수구에 빠져 죽으면 코미디.” 각자 처지와 관점에 따라 같은 세상을 다르게 느낄 수 있다는 얘기다.
멜 브룩스가 만든 코믹 뮤지컬 <프로듀서스>가 세계 금융위기 뒤 경제평론가들 사이에서 화제라고 한다. 대형 금융사건의 전개 과정과 닮은꼴인 까닭이다. 뮤지컬은 망해가는 제작자인 맥스가 장부 정리를 해주러 온 회계사 레오의 조언을 듣고 ‘최악의 공연’을 모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두 사람은 형편없는 감독과 값싼 배우들을 뽑아 히틀러와 나치를 찬양하는 극중극 ‘히틀러의 봄날’을 기획한다. 한편으로는 가난하고 늙은 여성들로부터 투자금을 모아 딱 하루 공연을 하고 튈 작정을 한다. 하지만 연극은 대박을 터뜨려 연속 상영에 들어간다. 결국 두 사람은 투자자들에게 약속한 수익금을 지급하지 못해 사기죄로 쇠고랑을 차게 된다. 뮤지컬은 감옥에서 두 사람이 다시 완벽하게 쪽박을 찰 수 있는 공연을 모의하는 것으로 끝난다.
<프로듀서스> 주인공들의 기획은 1990년대 초에 붕괴된 저축대부조합(S&L)이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를 일으킨 미국 월가의 도덕적 해이에 비유된다. 우리나라 저축은행 부실 사태도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 더 큰 문제는 ‘최악의 공연’ 주모자는 감옥에서 재기를 도모하지만, 금융 부실에 직간접으로 책임이 있는 당사자들은 대부분 무대의 주역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이다. 믿고 돈을 맡긴 예금자, 세금으로 부실을 메워줘야 하는 국민만 비극의 주인공이 됐다.
박순빈 논설위원 sbpark@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