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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금융의 후쿠시마, 부산저축은행 / 정영무

등록 2011-05-12 19:59

정영무 논설위원
정영무 논설위원
악(惡)에서 아(亞)는 무덤의 그림글자로, 마음 심(心)과 결합되면 ‘남이 죽었으면 하는 마음’이 된다. 어떤 이가 죽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은 근본적으로 폭력심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남에게 해를 가하고자 하거나 남이 해를 당하는 상태를 기꺼워하는 마음은 자신이 살고자 하는 마음,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과 분리될 수 없다. 남의 생명을 파괴하고자 하는 욕구 뒤에서 발견되는 것은 제 생명 보존 욕구이다. 악행은 그리하여 선의 명분 없이는 절대로 세계에 나타날 수 없다. 악인은 도덕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도덕이 이중적이기에 악을 행할 수 있다. 이상 도덕과 현실 도덕을 나눈 다음 이 둘을 자신의 행위 속에서 화해시키는 ‘악의 이중성’에 익숙하다.(우석영, <낱말의 우주>)

부산저축은행 사건은 놀라움과 상상력의 한계를 시험한다는 점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비슷하다. 신뢰가 생명인 금융회사가 서민들의 쌈짓돈을 제멋대로 요리하고 감독기관은 눈뜬장님이 돼 난장판이 벌어졌다. 미국의 법철학자 프랭크 마이컬먼은 ‘부패란 특수한 이해관계가 관철되면서 공공선이 와해된 상태’라고 정의했는데, 가장 적확하고 생생한 사례로 올릴 만하다. 어떻게 업계 1위의 금융회사 소유주와 경영진이 한통속이 돼 온갖 비리 행각을 벌일 수 있을까? 고객들의 돈을 떼어먹고 부실을 눈가림하고 사기성 후순위 채권을 팔아먹은 경영진의 행태는 악의 이중성이란 심안으로 볼 때 조금은 이해된다. 악인은 곧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일어난 사태를 합리화하고 평정 상태에 이르는 일에 친숙하다고 한다.

금융감독원은 지난해 초 부산저축은행에서 2000억원대의 분식회계를 적발하고 지난해 6월에는 2조원대의 부실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한다. 뇌물을 받고 눈감은 금감원 간부도 있지만 일찍이 부실 징후가 드러났는데도 덮어둔 게 화를 키웠다. 문제가 터지기 전에는 나서서 건드리려 하지 않은 금융당국의 책임이 크다.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금융감독 체계를 정비했다고 큰소리쳤지만 사고는 또 터졌다. 시스템은 달라져도 조직문화와 사람은 그대로였던 것이다.

유대인 수십만명을 독가스실로 보낸 카를 아돌프 아이히만을 사람들은 괴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법정에서 지켜본 아이히만은 달랐다. 놀랍게도 그는 책상 앞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처리한 관료였을 뿐이다. 어디에서도 괴물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런 경험에서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거악이라는 것도 평범한 일상적인 일로 가능하다.

아이히만이 어떻게 그런 복종적 태도를 가졌을까 의문을 품은 스탠리 밀그램은 행태적 연구로 악의 평범성을 뒷받침했다. 그는 심리실험을 통해 대부분의 인간은 비합리적인 권위일지라도 그에 복종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권위자와 한 약속을 지키려 하고, 갈등을 피해 순응적으로 변화하는 속성을 간파한 것이다.

금융당국은 물론 저축은행 감사까지 사고지점은 낙하산·회전문 인사로 얽혀 있다. 부실 처리 기준 또한 정치·정책적 판단에 따라 오락가락했다. 그 틈바구니에서 추상같아야 할 감독관이 복종적 태도를 취한 것이다. 조직의 품을 벗어나지 않으면 보답받는 문화가 존재하고, 정책 실패에 대해서는 책임 추궁을 받지 않은 탓이다. 검사를 나간 금감원 직원들이 컴퓨터 시스템이 알려주는 부실 정황을 확인하고도 그냥 넘어갈 만하다.

외압과 유착의 온상에서 선을 가장한 악, 평범한 악이 자란다. 따라서 금융감독 혁신은 외압으로부터 독립하고, 유착의 고리를 끊는 일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전과 이후가 같을 수 없고 달라져야 하듯, 부산저축은행 사건 이전과 이후는 달라야 한다. 모피아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몇몇 동물은 더욱 평등하다.” 그들만의 리그를 깨지 않으면 불행은 반복된다. 정영무 논설위원

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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