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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종석 칼럼] 대통령 노무현의 진정성

등록 2011-05-26 20:54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5월23일 노무현 대통령 서거 2주기 추도식이 열린 봉하마을에는 작년에 이어 또 비가 내렸다. 사람들은 “슬픔을 넘어 희망으로”를 내걸고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희망을 다짐했지만 하늘은 아직 쏟아낼 슬픔이 더 남아 있는 듯 보였다.

노무현은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쓰고 우리 곁을 떠났다. 이 오명은 정책을 발표하는 순간부터 온갖 음해로 흠집을 내며 그 실패를 기정사실화한 수구세력의 무차별 공세와, 자신의 잣대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좌회전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한다’는 다수 진보진영의 비아냥거림의 틈바구니에서 고착되었다. 물론 잘못도 있었고 부족한 면도 있었다. 그러나 노무현 시대가 성공적이었는지 실패였는지는 최종적으로 역사가 답해줄 것이다. 아니, 이명박 정부 3년3개월을 겪으면서 국민은 이미 그 답을 찾기 시작했다.

노무현은 정직했고 국민에게 솔직했으며 국익 앞에서 자신의 신조도 꺾은 지도자였다. ‘옳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회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며 고통스러워한 이라크 파병 당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정의의 전쟁이라며 파병을 정당화하려는 외교안보 관리들에게 “나는 이 전쟁이 정의의 전쟁인지 모르겠다”며 정부 안에서 그 표현을 쓰지 못하게 했다. 대신 국민에게 한반도 평화와 한-미 동맹이라는 현실적 이해 때문에 파병한다는 점을 솔직히 밝혔다. 정치 역정의 고비마다 현실적 이익보다는 명분을 선택한 그였지만 대통령 자리의 엄중함 때문에 자신의 신조마저 꺾었다. 전후 이라크에서 경제적 이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파병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우리 병사들의 희생을 대가로 경제적 이권을 챙길 수 없다고 했다. 물론 파병이 경제적 이권에 크게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라는 정확한 현실인식도 가지고 있었다.

노무현은 술수나 꼼수로 인기 얻기를 거부한 대통령이었다. 2004년 2월 초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관련국들이 북한을 설득하여 2차 6자회담을 성사시키고자 동분서주했다. 정부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언론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때마침 북한이 남북대화 통로를 통해 6자회담 재개에 동의한다는 연락을 해왔다. 나는 대통령 주재 수석보좌관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이 사실을 보고하고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북한의 6자회담 복귀 결정이 보안사항이지만 곧 해외언론을 통해 알려질 것입니다. 그러니 기자들에게 공개되는 회의 모두 말씀에서 전후 설명 없이 ‘6자회담의 전망이 밝아지는 것 같다’고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면 보안에도 문제가 없고, 며칠 후 북한의 복귀 사실이 공표되면 언론도 정부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인정할 것입니다.” 보고를 받은 후 대통령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한마디 했다. “하지 맙시다.” 지금도 살면서 내가 꼼수를 부리는 것 아닌가 느낄 때마다 대통령의 얼굴이 떠올라 흠칫 놀란다.

노무현은 직설적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정책을 결정할 때는 신중하고 냉철했다. 북한의 도발적 언행에 대해 가끔 진노했지만 한번도 그 감정을 정책으로 연결시키지 않았다. 하나의 정책이 형성되거나 수정되려면 숱한 관련부처의 검토회의와 대통령 주재 회의들, 그리고 거듭되는 숙고를 거쳐야 했다. 그는 자신의 독단적인 판단이 그대로 정책으로 이어지는 것을 두려워해서 소수의 관계자가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나온 자신의 말이 새로운 정책적 지시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국정운영에서 상식과 원칙을 중시했으며 반칙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역사상 가장 깨끗한 대통령이었지만 자신 주변의 작은 티조차 부끄러워하며 우리 곁을 떠났다.

내가 경험한 노무현은 실패한 대통령이 되기에는 대통령다움의 덕목을 너무 많이 갖춘 지도자였다. 다만 그 덕목 중 상당수가 새로운 시대의 대통령에게 필요한 소양이었기 때문에 구시대적 세력과 불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덕목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국민에 대한 참되고 애틋한 마음, 즉 진정성일 것이다. 지금 노무현을 경험한 국민은 그가 미완으로 남긴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해 앞장서는 이 진정성을 지닌 새로운 지도자의 출현을 바라고 있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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