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닉슨의 ‘체커 연설’이 대선 전날 폭로된 BBK 동영상과 겹쳐진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미-중 수교 비화를 담은 <중국에 관하여>를 출간했다는 소식을 듣고,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이 겹쳐졌다. 키신저의 말처럼 미-중 수교는 닉슨 행정부의 실용주의 철학으로 성공했다. 닉슨만큼 부침과 영욕이 엇갈린 대통령은 없다. 부통령 두번과 대통령 두번을 지낸 유일한 인물이지만, 그 과정에서 대선에 실패하고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도 낙선했다. 임기 중에 중도하차하는 최초의 미 대통령이 되는 굴욕을 겪었다.
그의 철학과 노선도 진폭이 컸다. 그는 미국에 매카시즘 공포를 일으킨 반미위원회를 주도했다. 매카시즘의 원조 조 매카시 의원은 큰소리만 쳤지, 앨저 히스 스파이 사건 등을 이끈 것은 닉슨이었다. 그는 상원의원 선거에서 경쟁자였던 전직 여배우 헬렌 더글러스를 ‘속옷까지 분홍빛’이라며 공산주의자로 모는 색깔론으로 당선됐다. 이 선거운동 때문에 ‘트리키 딕’(교활한 녀석)이라는 별명을 달았다.
반공주의 색깔론도 서슴지 않던 닉슨은 국정에서는 진보적이었다. 의원 시절부터 소수인종의 민권 확대를 옹호했다. 상원의장을 겸하는 부통령 때,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민권법 통과를 저지하려는 의회 보수파들의 필리버스터(의사진행방해)를 제한하는 조처를 취했다. 군산복합체들의 보이지 않는 로비를 뚫고 베트남전 종식과 미-중 수교를 이뤄냈다. 이 과정에서 베트남전 반대운동의 고리이던 징병제도 폐지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만든 미국의 사회보장제도는 닉슨 시절 가장 확장됐다. 사회연금과 의료보험(메디케어) 비용은 국민총생산의 6.3%에서 8.9%로 늘었다. 저소득층에 대한 식량 및 공공 지원은 50%나 많아졌다. 반면 국방비는 국민총생산의 9.1%에서 5.8%로 거의 50% 가까이 줄였다. 그의 의료보험 확대에 민주당 진보파의 대부인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도 반대했다가, 나중에 실수였다고 반성했다.
닉슨은 미국 힘의 한계를 직시하고, 냉전 종식과 다극시대를 향한 국제질서를 설계했다. 미-중 수교, 소련과의 전략무기 감축협상, 달러-금 태환제 포기 등이 없었다면, 지금의 국제사회는 다른 모습일 것이다. 미국 진보진영의 상징 노엄 촘스키도 닉슨이야말로 “마지막 자유주의적 대통령”이었다고 평했다. 대선에서 닉슨의 경쟁자로 가장 진보적인 민주당 후보였던 조지 맥거번도 “2차대전 이후 닉슨은 어떤 대통령보다도 중국과 소련에 대해 실용적 접근을 했다”며 “높은 역사적 평가를 받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내세운 국정지표는 실용주의이다. 그는 후보 시절 ‘경쟁에 뒤처진 사람들은 국가가 배려해야 한다’고 자주 말했다. 나도 이 말을 듣고 새로운 보수주의자가 나왔다고 감동했다. 그 후 그의 행보는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의 실용주의가 끝난 것은 아니다. 2년 가까이 임기가 남았다. 하려고 마음먹으면 짧지 않은 시간이다. 그가 닉슨에게 배울 것은 실용주의만이 아니다. 1953년 9월23일 닉슨 당시 공화당 부통령 후보는 텔레비전에 출연해, 불법 선거자금을 받아 개인적으로 유용했다는 혐의를 부인하며 “나는 체커를 돌려주지 않을 것입니다. 내 딸이 그 개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덧붙였다. 체커는 닉슨에게 당시 제공된 선물로 그 사건의 상징이었다. 체커를 통해 자신의 결백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연결해, 부통령 후보 낙마 위기에서 벗어나고 아이젠하워 대통령 후보의 선거운동에 전화위복이 됐다. 물론 세금환급 내역 등 모든 개인적 재정을 솔직히 공개하고 해명한 것이 바탕이다.
닉슨의 이 ‘체커 연설’이 지난 대통령 선거 전날 폭로된 이명박 후보의 ‘비비케이’ 동영상과 겹쳐진다. 닉슨도 결국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된 거짓말로 낙마했지만, 이 대통령의 장래는 어떻게 될까?
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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