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루이 14세 같은 ‘권력의 인격화’ 검찰의 행태도 크게 다르지 않다
“향후 검찰은 수사로 말하겠습니다.”
지난 6일 긴급 검찰간부회의 뒤, 김준규 검찰총장이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의 수사권 폐지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그렇게 말했다. 사뭇 비장하다. 진행중인 저축은행 수사를 통해 검찰을 둘러싼 난국을 타개할 것이며, 그 과정에선 어떤 성역도 없을 것이라는 다짐이다.
그런 다짐대로 될까. 단언하긴 이르다. 하지만 결과가 그리 신통치 않을 것이라는 조짐은 곳곳에서 보인다. 무엇보다 부산저축은행그룹 수사를 맡은 대검 중수부가 맥이 빠졌다. 조사를 받은 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까지 벌어졌으니 황망하기도 할 것이다. 그 전부터도 수사팀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하루하루 허덕대며 수사를 이어온 탓이겠다. 요즘은 파장 분위기까지 엿보인다. 이유는 별스럽지 않다. 당장 할 게 많지 않은 탓이다. 중수부는 은진수 전 감사위원과 김광수 금융정보분석원장을 구속하면서 기세를 올렸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며칠 전 중수부에 출두한 김종창 전 금융감독원장은 당일 귀가를 확신한 듯했다. 검찰도 참고인이라고 강조했다. 최종 목표를 향해 치닫는 수사라기보다 설거지를 하는 모양새에 가깝다. 전직 야당 의원과 전직 청와대 비서관이 돈을 받은 혐의가 나왔다지만, 사실이더라도 으레 해온 ‘여야 균형 맞추기’로 비친다.
검찰총장의 발언 이전부터 이번 수사의 한계는 이미 드러나 있었다. 너른 밭의 고구마줄기처럼 비리가 줄줄이 나올 것이라던 120여개 특수목적법인(SPC) 수사는 5월 중순 대부분 중단됐다. 후유증을 걱정한 정권 차원의 판단이라고 한다. 줄기 끝에 누가 튀어나올지도 두려웠을 것이다. 실세들과 연결된다는 브로커 박아무개씨는 지난 3월 진작에 출국했다. 그에게 거액이 전달됐다는 진술이 5월 초에 나왔지만, 지금으로선 더 파고들 방법이 없다.
그러다 보니 지금 두드러지는 것은 수사가 아니다. 검사들은 중수부 수사권 폐지 방침에 하던 일을 접고 술집에서 울분을 토하는 등 집단 반발했다. 그제 국회에서 중수부 유지가 확정됐으니 그런 시위는 성공한 셈이 됐다. 수사가 아니라 집단행동으로 말한 결과다.
그러잖아도 검찰이 조직의 이해를 위해 움직인다는 시각은 뿌리깊다. 예컨대 청목회 등 소액 정치후원금 수사는 사법개혁안 논의를 앞둔 국회를, 공사장 식당 비리 수사는 수사권 독립을 추진해온 경찰을 겨냥한 게 아니냐는 식이다. 이번 저축은행 수사도 중수부의 존재 과시용이라고들 한다. 그렇게 말할 근거가 충분하진 않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필요한 시점에 필요한 수사가 벌어졌다. 적어도 의심은 살 만하다.
국가권력의 행사가 권력자 개인의 목표·가치·기질·취향에 따라 좌우되는 것을 ‘권력의 인격화’라고 한다. ‘짐이 국가다’라고 한 루이 14세가 대표적이다.
검찰의 행태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2004년 법무부 신년교례회에서 당시 서울지검장이 “과거 약간의 사심이 개입한 인격화된 검찰권 발동으로 국민의 질책을 받았다”고 말한 바도 있다. 이제는 그 정도를 넘어 검찰 조직이 사람처럼 감정적 반응까지 보인다. 제 권한을 뺏는다고 짜증을 부리고, ‘두고 보자’고 으름장도 놓는다. 큰소리도 친다. 속내가 뻔히 다 드러나 보인다.
이번 사건은 검찰 입장에선 당장의 효용이 다한 사건일 수 있다. 언젠가 브로커 박씨가 귀국하는 따위 계기가 생기면 수사를 재개한다는 계산도 했음직하다. 그때는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는 권력이 대상일 것이다. 몇 차례 봐왔던 일이다. 비루한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정말 당당하게 수사로 말하겠다면, 나중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서 그래야 한다. 여기가 로도스다.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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