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혁상 영화감독·성적소수문화환경을 위한 모임 ‘연분홍치마’ 활동가
2008년 봄. ‘게이가 만드는 게이 다큐’를 찍어보자는 제안을 앞에 두고 나는 꽁꽁 얼어붙었다. 첫 연출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 아니었다. 게이 감독으로서 내 친구들의 삶을 담는 콘셉트의 다큐멘터리였기에 나 역시 영화를 통해 사회적 커밍아웃을 감행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주인공들에게도 큰 도전이었다. 성소수자가 주인공인 다큐멘터리였기에, 불특정 다수를 향한 커밍아웃은 필수 조건이었으니까. 천신만고 끝에 네 명의 주인공을 만났다. 그리고 결의했다. 게이 커밍아웃 다큐멘터리 제작이라는 이 원대한 커밍아웃에 함께하기를.
여름에 접어들며 본격적인 촬영에 돌입했다. 하지만 긴장은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사람들은 ‘남녀가 만나 비둘기처럼 다정한 가족을 꾸리며 사는 것이 참다운 인생’이 유일한 정답이라고 믿는 세상이었다. 이 답답한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나는 당신과 다르다’고 선언하는 것은 끔찍한 낙인이 되어 되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주인공들과 제작진은 서로를 다독이며 응원했다. 우리의 삶은 기록될 가치가 있었으니까. 게다가 그 누구도 제대로 기록해주지 않았던 숨겨진 역사였으므로.
그리하여 2011년 여름 <종로의 기적>은 전국에 개봉되었다. 우리에게 개봉은 또 하나의 거대한 커밍아웃이었다. 두려움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성소수자들이 ‘떼로 나오는’ <종로의 기적>의 집단적 커밍아웃에 공감한 이성애자 관객들 역시 뜨겁게 커밍아웃하기 시작했다. “저도 성소수자를 지지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응원하겠습니다!” 그 열기 속에서 우리는 힘을 받았다. 그야말로 신이 났다. 트위터 친구의 말처럼 <종로의 기적>을 상영하는 극장은 어느덧 ‘즐거운 커밍아웃 파티의 현장’이 되고 있었다.
이 즐거운 파티에서 누구보다 나를 놀라게 했던 사람은 나의 모친이었다. 아직 부모님께 커밍아웃하지 않았던 나는 영화 개봉 즈음 두 분께 말씀드릴 계획이었다. 하지만 폭풍처럼 밀려오는 개봉 일정에 적당한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모친의 전화 한 통. “영화 잘 봤다.” 순간 눈앞이 하얘졌다. 나 대신 내 영화가 모친께 먼저 커밍아웃을 한 것이다. “엄마 아들 게이라는 거… 괜찮으세요?” 떨리는 내 목소리와는 달리 모친은 침착했다. “니 백일 사진 나와서 깜짝 놀랐다. 근데 게이라는 거… 그러려니 해야 하는 거잖아. 영화 잘 만들었어. 많이 배웠네. 그리고 너, 이 엄마 현대적인 거 몰랐니?” 막연하게 ‘꽉 막힌 노친네’라 생각했던 양친은 의연하게 당신 아들이 게이임을 받아들였다. 이건 분명 <종로의 기적>을 통해 당당하게 커밍아웃한 수많은 LGBT 성소수자 덕분이었다. 그들의 용기가 나의 모친을 비롯한 수많은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하지만 나의 커밍아웃은 아주 운이 좋은 케이스일 것이다. 여전히 많은 성소수자들은 이성애가 정답인 사회 속에서 숨죽이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의 소심함을 탓할 수만은 없다. 결국 문제는 다름을 존중하지 않는 이 사회의 폭력성 때문이니까.
그래서 나는 <종로의 기적>이 여전히 숨죽이며 살아가는 성소수자들을 공동체로 이끄는 등대가 되어주길 바란다. 내가 종로에 처음 발을 내디뎠던 순간, 나는 안도했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여기 있었구나. 나는 혼자가 아니었구나. 공동체를 확인하며 나는 생의 의지를 느꼈다. 성 정체성으로 방황하며 자괴감에 빠졌던 내게 그것은 기적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더이상 자신이 비정상이라 고민하지 않고, 이성과 결혼하여 거짓된 삶을 꾸리지 않고, 왕따에 지쳐 목숨을 끊는 선택 따위 하지 않기를. 비록 얼굴은 좀 못생기고 똥배도 나왔지만, 당당하고 유쾌하게 ‘종로의 기적’을 일구며 살아가는 롤모델들이 바로 여기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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