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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효순 칼럼] ‘참을 수 없는 한도’의 이상한 기준

등록 2011-07-25 18:55

김효순 대기자
김효순 대기자
너무나 태연하게 말한다. 참을 수 없는 한도를 넘어서지 않았다고. 서로의 처지, 살아온 경험, 세상을 보는 눈이 아무리 다르다고 해도 이건 심하다. 지난 21일 야스쿠니신사 합사 취소를 요구하는 한국인 희생자 유족들의 청구를 모두 기각한 일본 도쿄지법의 판결을 접한 소감이다. 재판의 원고 가운데는 버젓이 살아 있는데도 사이판섬에서 전사한 것으로 처리돼 야스쿠니신사의 명부 ‘영새부’에 올라 있는 김희종씨도 있다.

도쿄 한복판에 있는 야스쿠니신사는 1945년 패전 때까지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었다. 원래는 메이지유신 이후 한동안 내전이 계속됐을 때 관군 쪽에 섰다가 숨진 병사들의 넋을 기리는 장소였다. 그러다 일본이 침략전쟁의 길로 매진하면서 ‘천황’을 위해 싸우다 죽으면 ‘군신’이 된다는 선전으로 젊은이들을 사지로 몰아간 국가신도의 성소로 떠받들어졌다.

일제 때 영새부에 올리는 합사 결정은 육군대신과 해군대신이 ‘천황’의 재가를 얻어 결정했다. 야스쿠니 합사 결정은 일본 군국주의, 국가신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패전 후 점령군 사령부의 조처로 국가신도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천황’이 인간선언을 한 뒤에도 일본 정부의 음성적인 야스쿠니신사 관여는 계속됐다. 형식적으로는 야스쿠니신사가 합사 대상자를 정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후생성이 지자체에 요구해서 받은 전몰자의 정보, 구체적으로는 이름, 계급, 사망 이유 등을 신사 쪽에 제공했다. 야스쿠니는 이 정보를 토대로 합사 대상을 정했다.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전사한 친족들의 합사 취소를 요구하며 소송이나 운동을 벌이는 일본인들이 있다. 일본 사회의 독특한 구조로 보면 대단히 용기있는 사람들이다. 백보 양보해 이들의 문제제기를 일본 사회 내부의 일이라고 치자. 그렇지만 한국인이라면 도대체 무슨 명분으로 합사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한번 제소한 한국인 원고들의 처지에서 생각해보자. 일제는 원고들의 아버지 등 가까운 친족을 강제로 끌고 가서 오랜 기간 생사도 알려주지 않고 보상도 해주지 않았다. 하염없이 기다리다 지친 유족들이 어느 날 자신의 아버지나 남편이 일본에서 군신으로 모셔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억장이 무너질 것이다. 하물며 천신만고 끝에 겨우 살아 돌아온 사람이 자신이 합사돼 침략전쟁 미화에 이용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면 당연히 분노가 치솟을 것이다. 이들로서는 합사된 친족들이 군국주의의 감옥에 여전히 갇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도쿄지법은 참을 수 없는 한도를 넘은 일이 아니라며 청구를 죄다 거부했다. 재판장은 강제나 불이익을 동반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의 신앙에 관용을 해야 한다는 최고재판소의 판례를 언급하며 야스쿠니신사의 종교의 자유에 손을 들어주었다. 지난해 12월 오사카고등법원은 일본 정부의 전몰자 정보 제공이 헌법의 정교분리를 위반한 것이라고 판결했지만, 도쿄지법은 정부가 야스쿠니신사를 “극진하게 대접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뒷걸음질했다.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는 외국인은 한국인이 약 2만1000명, 대만인이 약 2만7000명 선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소송에서 신사 쪽은 합사된 한국인 유족의 대부분은 별다른 불만이 없으며, 극소수의 이의제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진절머리가 나서 발언을 하지 않는 것을 암묵적 승인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번 소송 심리를 주재한 재판장은 아마도 전후세대일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 육법전서 외에 뭐가 들어 있을까? 전후보상 소송에 원고 쪽 증인으로 법정에 자주 나선 경험이 있는 한 일본인 학자한테서 법관들이 아주 기초적인 역사적 사실조차 몰라 당황스러웠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런 재판을 맡으면 최소한 역사책 몇 권은 읽고 재판에 임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야스쿠니는 사랑, 자비, 겸양, 봉사 등을 말하는 통상적 의미의 종교단체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일본을 방문하는 외국의 정상들이 왜 야스쿠니 참배를 기피하겠는가? 이번 판결은 참을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섰다. 나의 인내심에 문제가 있는 건가? 대기자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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