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순 대기자
일제 강점 100년을 맞은 작년 8·15에는 수수방관하던 정치권이 올해는 지도부가 서로 독도를 방문하겠다고 아우성을 치더니 해병대 주둔론까지 나왔다. 일제 피해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데는 그렇게 인색하다가 갑자기 나서니 좀 민망하다. 어설픈 대응으로 판을 키운 일본 자민당 우파 소속 의원들의 입국 금지 파문에 거저 올라타려는 의도로 보인다.
자민당 우파 의원들의 방한에 앞서 전날 밤 입국을 시도하다 쫓겨난 일본인 대학교수가 있었다. 시모조 마사오라는 이 교수는 ‘다케시마(독도) 문제 연구회’ 좌장을 맡고 있으며 자민당 우파 의원들을 동원한 입국 기획의 주역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소속 대학은 ‘다쿠쇼쿠대학’이다. 현행 외래어 표기방식으로는 원음대로 쓰고 한자를 병기하지 않기 때문에 다쿠쇼쿠라는 말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는 일반 독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한자로는 척식이라고 쓴다. 미개한 땅을 개척해 사람을 이주시킨다는 것이다. 일제가 1908년 말 세워 조선인의 토지를 수탈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떠올리면 식민지주의 시대의 용어라는 것이 실감나게 전달된다.
다쿠쇼쿠대학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가쓰라 다로가 1900년 도쿄에서 설립한 ‘대만협회학교’에 이른다. 교명이 몇 차례 바뀌었다가 1918년에 현재의 이름이 됐다. 대만협회학교의 설립자이자 초대 교장인 가쓰라 다로는 조선의 국권을 강탈한 장본인이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등장하는 바로 그 사람이다. 윌리엄 태프트 미국 육군장관은 필리핀을 방문한 뒤 1905년 7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도쿄에 와 임시로 외상을 겸하고 있던 가쓰라 총리와 러일전쟁의 뒤처리를 위한 비밀협정을 맺었다. 미국과 일본이 필리핀과 조선에서 각기 상대국의 주도권을 인정한 것이 골자이다. 이 밀약 이후 4개월이 채 되지 않아 강제로 체결된 것이 을사늑약이다. 일제가 1910년 조선을 완전히 멸망시켰을 때의 총리도 가쓰라였다.
다쿠쇼쿠대학이 대만협회학교로 출범한 것은 가쓰라가 육군대신과 총리가 되기 전에 대만 총독을 지낸 것과 관련이 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식민지로 빼앗은 대만의 효율적 통치를 위한 기도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1907년에는 조선에도 경성분교를 세웠다. 이런 배경을 가진 대학이니 일본의 패전 이후에도 학풍이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1950년, 60년대만 해도 우익 청년들의 집합소였던 다쿠쇼쿠대학과 고쿠시칸(국사관)대학 학생들과 조선고급학교 재학생들 사이에 살벌한 싸움이 이따금 벌어졌다. 재일동포들의 회고담에는 우익 대학생들 중 무술 유단자가 많아 조선고교 학생들이 많이 당했다고 한다. 일본 영화 <박치기>에 묘사된 것보다 다툼이 훨씬 심했다.
시모조 교수는 올해 ‘조선왕실의궤’의 반환을 놓고 일본 정치권에서 논란이 벌어졌을 때 중의원과 참의원의 관련 상임위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자신의 지론을 되풀이했다. 그의 주장을 몇 토막 그대로 옮겨보자. ‘문화재 반환은 1965년의 한-일 문화재·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으로 일단락됐다’ ‘한-일 간의 화해, 미래지향을 얘기하지만, 그런 것은 침략당한 다케시마를 반환받은 후에 하는 것이다’ ‘고구려는 한국이나 중국과 아무 관련이 없다. 한국 드라마 <주몽>이나 <태왕사신기>는 일본인을 세뇌시키기 위해 만든 것인데 엔에이치케이가 일본 국민의 시청료를 받아 방영하고 있으니 어처구니없다’는 것 등이다. 최근 도쿄에서 벌어진 한류 방영 반대 시위는 그의 이런 주장에 공명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일 것이다.
시모조의 주장이 일부 일본인들의 속내를 대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너무 수준이 낮아 일본인 다수의 공감을 얻기는 어렵다.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틈만 생기면 시비를 걸어 대중매체의 시선을 끌려고 끊임없이 기획을 한다. 우리가 할 일은 그들의 수준을 간파해 적절히 대응하는 것으로 족하다. 그들이 ‘생쇼’를 벌일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주는 일은 가급적 피하는 게 좋다. 종래 ‘친한파’라고 알려진 일본인 가운데 이런 역사적 화석물이 많았다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대기자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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