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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론] 아이들에게 눈칫밥을 먹이려 하는가 / 박영석

등록 2011-08-15 19:37수정 2011-08-15 23:13

박영석
대주그룹 지에스건설
대표이사
박영석 대주그룹 지에스건설 대표이사
서울시의 주민투표를 앞두고
누가 무상급식 대상이고 아닐지가
아이들 사이에서 화제라고 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무상급식 전면 실시 문제가 기어이 전 서울시민을 시험 대상으로 삼는 주민투표에 이르게 되었다. 오는 24일 실시되는 주민투표에는 무려 180억원이 넘는 비용이 소요된다고 하니 가구당 수해지원금 100만원 앞에서 한숨짓는 시민들의 허탈함이 더 비통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여당 내에서조차 반대 목소리가 나오고 있고, 민주당에서는 투표 참가율을 33% 미만으로 떨어뜨려 투표함 개봉 자체를 막자는 전략까지 논의하고 있다고 한다. 100년 만의 수해에 지친 시민들은 투표하라고 독려하는 목소리, 투표하지 말라고 설득하는 목소리 사이에서 그저 한숨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심각한 문제가 또 있다. 투표 이후 우리 아이들이 받을 마음의 상처다. 초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는 친구에게서 들은 말인데,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 이런 말이 화젯거리라고 한다. 상위 계층을 제외하고 일부 아이들에게만 무상급식을 실시한다는 전제 아래 누가 무상급식 대상이고 누가 대상이 아닐지에 관한 대화라고 한다. 또 전면 무상급식이 된다는 전제 아래 “나는 부실한 반찬 안 먹는다”고 따로 도시락 싸올 거라는 부잣집 아이들도 있다고 한다.

우리가 전면 시행이든 일부 선별 시행이든 급식 문제를 논의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골고루 잘 먹이자는 데 있다. 그런데 이러다가는 아이들 상당수가 눈칫밥을 먹게 생겼다. 특히 무상급식 대상과 비대상이 구분되고 나면 그 분류가 바로 가난한 집 아이와 부잣집 아이를 따로 줄세우기 하는 격이니, 급식대 앞에서 배식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괜스레 주눅들 것은 분명하다. 점심을 굶는 한이 있어도 무상급식 비대상이 되려고 하는 아이들까지 생길지 모르는 일이다.

이러고 보면 골고루 잘 먹이자고 시작한 논쟁이 결국 아이들에게 눈칫밥을 먹이는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 눈칫밥 먹고 자라는 게 어떤 설움인지 저 가난한 유년의 질곡을 견뎌온 40대 이상 세대는 잘 안다. 나처럼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된 경우는 생각만 해도 중죄인이 되는 느낌이다. 우리들 중에 누가 아이들에게 그런 마음고생 시킬 자격이 있는가.

지금이야말로 슬기롭게 수해를 이기는 한편으로 무상급식 문제에 관해 지혜를 발휘해야 할 순간이다. 논쟁의 핵심은 ‘일부 아이들에게만 무상급식을 시행할 경우 생길 수 있는 위화감’에 관한 우려와 ‘시민의 혈세로 무상급식이 필요 없는 부유층에게까지 혜택을 줄 필요가 없다’는 인식 간의 괴리다.

사실 전면 무상급식을 시행할 경우 적지 않은 예산이 필요할 것이고 그 돈이 결국 시민들 세 부담 증가로 이어질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늘어나는 세금의 세원이 대부분 소득이 많은 계층에게 편중되는 부가세 성격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더 부유한 사람이 더 많은 세금을 내게 되고 그 자금으로 무상급식이 실시되는 것이라면 전면 무상급식은 ‘시민의 혈세로 무상급식이 필요 없는 부유층에게까지 혜택을 주는’ 불합리한 일이 아니라 세금을 더 내게 되는 계층에게는 유상급식인 셈이며 ‘소득의 효율적 분배’로 해석할 수 있다. 결국 학교에 직접 내는 급식비를 세금으로 내는 방식이니 이들은 무상급식이 아닌 것이다.

이제 주민투표는 되돌리기 어려운 일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더 넓은 안목에서 문제의 본질을 보고 인식을 전환하여 수해만큼이나 안타까운 이 첨예한 갈등의 질곡을 벗어났으면 한다. 우리가 경제발전을 위해 함께 허리띠를 졸라매고 저 60~70년대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났듯이. 우리가 마음을 열고 지혜를 모으면 주민투표에 쓰일 180여억원을 아낄 수 있다. 소모적인 논쟁과 정략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가난한 집 아이나 부잣집 아이나 누구도 눈칫밥 먹지 않고 함께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마음 편히 운동장에서 뛰어놀게 할 수 있다. 나아가 언젠가 더 영양가 있는 건강식을 제공하여 모든 아이들을 나라의 기둥으로 튼튼히 자라게 할 수 있다.

여야 정치권이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올인’하는 모양새를 보면 내년 총선이나 대선을 염두에 둔 전초전의 성격으로 보여 참으로 안타깝다. 아무리 옳은 취지의 일이라도 아이들 먹는 문제를 시험에 들게 하는 일은 죄악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눈칫밥을 먹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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