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동 논설위원
이토 히로부미의 10·26,
박정희의 10·26, 그리고
오늘 서울시장을 뽑는 10·26
박정희의 10·26, 그리고
오늘 서울시장을 뽑는 10·26
“3발 맞았어! 쏜 자는 누구야?”
하얼빈 역두에 쓰러진 이토 히로부미는 그렇게 외쳤다. 숨을 거두기까지 약 30분간 그는 측근들과 몇 차례 얘기를 나눴다. 마지막 순간, 자신을 쏜 사람이 조선사람이란 걸 안 그는 “나를 쏘다니, 바보 같은 놈”이라고 뇌까렸다. 그러곤 물었다. “난 괜찮아. 누가 또 당했는가?” 동행했던 측근 모리 가이난도 다쳤다고 하자 “모리도 당했는가…” 하고는 숨을 거두었다. 유언 한마디 없이 즉사했다는 정설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일본인들이 믿고 있는 이토의 마지막 순간이다.
1909년 10월26일, 러시아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를 만나 조선 지배 문제를 매듭지으러 하얼빈역에 내렸던 이토는 안중근 의사의 총을 맞고 그렇게 갔다. 초대 총리에 3차례나 더 총리직을 맡았고 초대 조선통감을 지냈으며 내각경에다 귀족원 의장까지 했던 이토. 한반도 식민화의 원흉이자, 아시아를 파괴와 살육으로 얼룩지게 했던 대륙침략과 태평양전쟁으로 내달린 일제의 토대를 닦은 그는 지금도 일본에선 최고의 영웅이다. 여론조사에서 근현대 일본 영웅 수위 자리를 다툰다. 심지어 안 의사가 이토를 죽였기 때문에 일본이 조선을 식민화할 수밖에 없었다는 황당한 얘기가 버젓이 나돌고 있다. 세상은 엄청나게 바뀐 듯하면서도 바뀌지 않았다.
그 70년 뒤인 1979년 10월26일,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일본 관동군 장교(다카기 마사오) 출신 대통령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총에 맞아 죽었다. 그가 안가 ‘대행사’에 불려나갔던 여인의 무릎에 머리를 떨구고 내뱉었다는 마지막 말도 “난 괜찮아”였다. 혹자는 그가 남겼다는 그 마지막 말을 강조하며 진정한 영웅의 풍모였다고 치켜세웠다. 영웅이라는 자들은 본시 그렇게 죽는 법인진 모르겠으나, 한달에 2~3회의 대행사, 7~8회 열었다는 소행사가 영웅에게 어울리는 행사였을까. 하지만 지금 그를 대한민국 최고의 영웅으로 받드는 사람들이 이 땅에는 셀 수도 없이 많다.
1979년의 그 다음날 새벽, 수유동 우리 집 창문을 누가 두드렸다. 급히 달려왔는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아버지 친구분은 신문 호외를 내밀었다. 아마도 ‘대통령 유고’라고 달았을 특호 활자의 시커먼 제목만 기억에 남은 그 호외를 대했을 때 형언할 수 없는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이제 끝난 것인가. 사람들은 그럼에도 모두 쉬쉬했다. 아직 내일을 알 수 없는 세상이었다. 그 석달 전인 7월17일,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으로 전국의 여러 교도소에서 복역하던 박형규·윤반웅 목사, 양성우 시인, 송기숙 교수 등 86명이 제헌절 특사로 풀려났다. “개전의 정이 보이고 행형 성적이 우수하면 계속 가석방의 은전”을 베풀겠노라던 법무부의 당당한 발표문처럼 유신체제는 그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는 듯 보였다. 불과 석달 뒤 부마항쟁에 이어 벌어질 일을 아무도 낌새채지 못했다.
그해 12월 중순 어느 날 밤 지축을 흔들며 장갑차들이 무리지어 신촌 금화터널을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이듬해 봄 학생들이 들고일어서고 광주가 피로 물들었다.
다시 30여년이 지난 10월26일, 하필 이날이 서울시장 투표일이라니.
지나친 감상이겠으나, 세상은 아직도 “난 괜찮아”를 남기고 죽은 사람들과 그들을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사람들이 한쪽에 있고, 그들과 삶을 걸고 싸웠던 “바보 같은” 사람들이 다른 한쪽에 있는, 갈라진 싸움판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6월항쟁과 87년체제를 거치고서도, 세상은 여전히 100여년 전에 그 말을 하고 죽었다는 자와 그 후예들이 지배하고 있는 건 아닌가. 그게 아니라 이미 흘러가버린 옛 시절의 환영을 보고 있는 것인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어쨌든 투표는 해야지.
한승동 논설위원 sdhan@hani.co.kr
한승동 논설위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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