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형 경제부 기자
혹시나 수능 결과로
모든 걸 망쳤다고
힘들어하는 아이가
곁에 있다면 말해주자
모든 걸 망쳤다고
힘들어하는 아이가
곁에 있다면 말해주자
5~6년 전보다는 훨씬 뜸해지기는 했지만 마흔줄에 들어선 지금도 가끔씩 꾸는 꿈이 있다. 정수리 끝이 황량해지기 시작하는 나이가 돼도 대한민국 사람들의 무의식의 발목을 꽉 잡고 있는 그것. 군대와 입시일 텐데, 나는 군대를 다녀온 적은 없으니 입시를 준비하는 꿈이 꾸준히도 무한반복된다. 패턴은 늘 비슷하다. 고3 여름방학인데 국어 과목의 고전문학 부분을 시작도 못했다거나, 수학 문제집의 미분 영역부터 하나도 풀지 못했다거나 하는 식이다. 살면서 경험하는 중요한 사건들도 곧잘 까먹는 내가 입시날 주변의 풍경만은 아직도 기억하는 걸 보면 입시 스트레스가 여전히 꿈에 등장하는 게 놀라울 것도 없다.
그 입시 스트레스의 짧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1990년대 초반 광풍이 불던 때 재수까지 해서 이른바 명문대에 갔다. 하지만 대학 입학 후 딱 20년이 지난 지금의 긴 결론을 말하자면 ‘좋은 대학 가면 뭐하나, 그래 봤자 회사원인데’ 쪽에 한 표 추가다.
물론 요즘처럼 취업난이 심각한 때 번듯한 직장에 정규직 사원으로 입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예전 같으면 4년제 대학만 나오면 어렵지 않게 취업할 수 있었던 회사에 명문대와 석박사 출신들이 몰릴 뿐 아니라 고졸 취업문에도 대졸자들의 경쟁률이 박터진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특별한 결격사유만 없으면 가장 쉬운 선택이라고 생각했던 ‘평범한 직장인’이 이제는 가장 이루기 힘든 꿈 가운데 하나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자칭 엘리트 직장인 둘 중 하나의 속을 들여다보면 ‘그래 봤자 회사원’이라는 자조가 있다. 자식교육으로 골머리를 싸매는 엄마들의 속내 한구석에도 ‘사교육비 처들여 좋은 대학 가면 뭐하나, 그래 봤자 회사원 될 텐데’라는 갈등이 적지 않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최근 내놓은 조사자료를 보면, 대기업의 대졸 신입사원이 임원으로 승진할 확률은 0.6%에 불과한데다 임원은 바라지도 않고 그저 아이들이 대학 갈 때까지만 직장에 남고 싶은 희망조차 이루기가 쉽지 않으니 좋은 대학에서 좋은 직장으로 이어지는 안정된 삶의 기준은 사라진 지 오래다.
1년에 하루, 촌각을 다투는 금융시장도, 바다 건널 채비를 마친 비행기도 멈추고 온 국민이 숨을 죽이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이 돌아왔다. 시험날이면 몰려오던 한파는 없지만 추운 날씨보다 더 창백한 얼굴의 수많은 아이들이 떨리는 마음으로 시험장으로 들어갈 것이고, 또 수많은 엄마들이 시험장 앞에서 기나긴 기도문을 외우며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또는 기대 이상의 선전을 간절히 바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시험이 그렇듯 만족스러운 결과보다는 아쉬운 결과물을 받아들 아이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답안지를 확인하며 원하는 대학의 꿈이 물거품이 됐다고 낙심하는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도 어두운 터널 안에 있을 게다. 그래도 아이보다 훨씬 긴 시간을 살아온 엄마는 알고 있다. 대학입시라는 지독한 관문을 통과한 뒤에도 우리 삶에는 더 많은 난제가 지뢰밭처럼 널려 있다는 걸.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저절로 풀릴 것만 같았던 인생은 평생에 걸쳐 애써 풀어야 하는 실타래라는 걸.
일본 감독 기타노 다케시의 유일한 청춘영화인 <키즈 리턴> 마지막 장면에서 프로 권투선수의 꿈이 좌절된 스무살의 주인공이 묻는다. “우리, 끝난 건가?” 친구가 대답한다. “바보야, 우린 시작도 안 했잖아.” 혹시나 모든 걸 망쳤다고 힘들어하는 아이가 곁에 있다면 “논술 준비라도 부지런히 해보자” 같은 격려 대신 아이를 꼭 끌어안고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괜찮아, 아직 시작도 안 했잖아.”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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