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철우 스페셜콘텐츠팀 기자
기업들로선 전자주민증이
군침 돌게 하는 시장 아닌가
군침 돌게 하는 시장 아닌가
15년 전인 1996년 이맘때 당시 내무부가 도입을 추진하던 이른바 전자주민카드 사업을 취재한 적이 있다. 내무부는 3400만명의 종이 주민등록증을 전자칩이 든 전자카드로 바꾸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이에 시민사회는 크게 반발하고 있었다. 예민하게 반응해 정부 당국자는 신문사로 직접 찾아와서 한 장의 전자카드에다 주민등록등·초본, 운전면허증, 의료보험, 지문을 비롯해 40여가지 개인정보를 다 넣으면 “행정 효율이 높아지고” “투자 비용에 비해 국가경제의 실익은 23.5배나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무모한 계획이었다. 다행히 계획은 1998년 공식적으로 백지화됐고, 1999년 일제갱신 때 종이 주민증은 그저 플라스틱으로 겉모습만 바뀌었다. 만일 계획이 일사천리로 시행됐다면? 전자화한 개인정보의 해킹과 유출 사고가 날로 커지는 요즘 생각하면 끔찍함마저 느껴진다. 엄살이 아니다. 지난 7월 주민등록번호가 포함된 무려 3500만명의 개인정보가 이름난 포털사이트에서 해킹으로 털렸고, 2008년엔 다른 웹사이트에서 1800만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됐다. 행정관료의 기대대로 온갖 개인정보를 몽땅 모아두었더라면 지금 우리는 어떤 신종 사고를 경험하고 있을까?
퇴장했던 전자신분증 논란이 다시 등장했다. 현재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선 새로운 전자주민증 도입 계획을 담은 주민등록법 개정안이 심사를 앞두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의 날치기 통과라는 엄청난 회오리 속에서, 국민 정보생활에 큰 영향을 줄 개정안이 소홀히 다뤄지진 않을까 걱정도 앞선다.
물론 돌아온 전자주민증은 ‘무모한’ 전자주민카드와 많이 다르다. 40여가지 정보를 한 장에 넣겠다는 계획은 빠졌다. 주민등록번호와 지문만 보안성 뛰어난 전자칩에 심고 정보는 판독기에서만 볼 수 있게 하겠다 한다. 곧 낡은 주민증을 일제갱신할 시기이니 ‘하는 김에’ 전자주민증으로 바꾸자는 게 정부 주장이다.
그런데 두 차례의 전자주민증 추진 과정을 보면서, 정보인권이니 프라이버시니 하는 말보다 비용 절감이니 기술경쟁력이니 하는 말이 자꾸 먼저 떠오르는 것은 어쩐 일인가? 이번 전자주민증 사업의 뼈대는 대기업이 참여한 조폐공사 컨소시엄이 내놓은 용역연구보고서를 바탕으로 마련됐다. 국민 신분증 논의의 중심이 기업에 쏠린 셈이다. 또 전자주민증 사업 보도는 관련 정보보안기업들의 주가를 들썩이게 한다. 한 보안업체가 1998년 당시 행정자치부 장관 등을 대상으로 로비를 벌이려 했던 흔적이 2001년의 어느 검찰 수사에서 드러나기도 했다.
사실 기업들로선 전자주민증이 군침 돌게 하는 시장 아닌가. 갱신 때마다 전자주민증에 들어갈 3500만개의 전자칩이 필요하다. 판독기는 당장 공공기관·금융·병원·부동산 등 20만곳에서 쓰일 것이다. 갖가지 보안인증 시스템은 필수다. 정부가 최근 국회에 낸 건의문엔 이런 표현도 있다. 행정안전부는 전자주민증 도입 필요성으로 ‘해외시장 진출’을 꼽으며 “전자신분증 기술 해외진출 가능. 동남아 등 30개국 약 50억달러 규모(2011년 스리랑카 등 10개국 5억달러 협의중)”라고 밝혔다. 국민의 공적 정보를 보호하는 정부가 민간업체의 해외진출까지 배려해 사업을 추진한다니 놀라운 일이다.
당연히 논의의 출발점은 프라이버시다. 개인정보 통제권은 자신이 지닌다는 정보인권은 정보시대의 세계표준이다. 정부는 행정 효율과 해외시장 창출에 앞서 정보인권을 숙고하고 높이는 쪽으로 움직여야 한다. 전자주민증은 논란과 우려를 다 따져보고 나서 시행할지 결정해도 결코 늦지 않는 그런 문제다.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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