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연탄으로 겨울나는 사람들
빈 땅에 포장지 두르고 살았다
나무, 기름, 연탄 다 써봤지만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연탄 땐다 1960년대 나온 구공탄(구멍이 19개인 십구공탄을 줄여서 부르던 말)은 혁신이었다. 바싹 말린 나무를 때 구들을 데우는 구식 아궁이는 점점 사라졌다. 하지만 방구들 사이로 스며나오는 구공탄의 일산화탄소는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 뒤로 나온 것이 물을 끓여 순환시키는 ‘새마을보일러’다. 구공탄도 구멍이 22개인 ‘가정용 무연탄 2호’로 바뀌었다. 가스 사고가 현격히 줄긴 했지만 여전히 ‘가스 중독’은 겨울 뉴스의 단골 메뉴였다. 80년대 후반, 등유를 사용하는 기름보일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주부들은 연탄갈이에서 해방되기 시작했다. 현재 도시에선 도시가스가 대세다. 연탄 갈 걱정도 없고, 등유보다 상대적으로 싼 연료 덕분에 시민들의 겨울나기는 과거에 비해 훨씬 편해졌다. 하지만 세계적인 대도시 서울에서 아직까지 연탄을 때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이유는 다양하다. 최근에는 일종의 ‘재테크’로 인식돼 인기를 끌기도 했다. 문제는 연탄 외에는 겨울날 방법이 없는 ‘에너지빈곤층’이다. ‘사랑의 연탄 나눔운동’ 쪽에선 전국적으로 대략 20만가구가 연탄을 사용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가운데 서울에서만 3천여가구가 지원 없이는 연탄조차 땔 수 없는 위급한 상황이라고 한다. 이번 ‘낮은 목소리’는 서울의 대표적 달동네인 상계동 ‘합동마을’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42년째 살고 있는 허영임(가명·68) 할머니를 만나 빈곤층의 겨울나기를 들어봤다. 기사는 인터뷰를 바탕으로 독백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저는 경북 문경 점촌에서 태어났어요. 27살에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공장일을 하면서 용두동·신설동 셋방을 전전하며 살았어요. 남편을 만나고 나서 여기 합동마을로 옮겼어요. 그때 백일도 안 된 큰딸을 업고 오르막길을 올라오면서 ‘이런 산속에 집이 있나?’라고 놀랐던 기억이 나요. 왜 이곳으로 왔냐고요? 이 동네가 원래 더이상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에요. 빈민·철거민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서울의 끝’이에요. 사실 서울이라기보다는 경기도에 더 가깝고요. 산 뒤가 바로 군부대라, 군사보호지역이기도 해요. 처음 도착하고 빈 땅에 말뚝 박고 포장지 둘러서 거처를 마련했어요. 초라했지만, 그래도 편하게 다리 뻗을 공간이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하지만 며칠 뒤 무허가 건축물이라며 구청에서 철거를 하더라고요. 제가 이 합동마을에서 42년째 살고 있는데 36번을 철거당했어요. 거의 1년에 한번꼴로 철거를 당한 거죠.
왜 이곳이 합동마을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산 하나씩을 등지고 사는 상계3·4동(주민들은 삼사동이라고 부름) 일대 산동네를 말하는데, 사람들 말로는 일이 터지면 ‘합동’이 잘 됐다고 해서 합동마을이라고 불렀대요. 철거를 당하면, 다시 슬레이트와 포장지를 사용해 집을 지었죠. 이곳으로 이사온 뒤엔 번듯한 지붕과 벽이 있는 집에서 살아 본 적이 없어요.(지금도 할머니의 집은 회색 슬레이트 지붕과 퍼런 포장지가 전부다.) 그래도 거기서 아이 둘을 더 낳았어요. 살 만하니깐 남편이 세상을 떠나더라고요. 20년 전쯤에 간경화가 갑자기 찾아왔어요. 그 뒤 아파트·병원 등에서 청소일을 하면서 살아왔어요. 지금은 한달에 55만원 정도 받아요. 그래도 일을 계속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허름해 보여도, 이곳이 여름엔 살기 좋아요. 마주보는 수락산 봉우리도 아름답고, 무엇보다 시원해요. 선풍기 없어도 여름을 날 수 있어요. 그런데 겨울이 문제예요. 처음엔 장작을 때면서 살았어요. 산 중턱이라 나무가 많았거든요. 나무를 몇년 때다 보니 구공탄이 나오더라고요. 그때는 지금 연탄보일러하고 달랐어요. 나무를 때는 아궁이에 단지 석탄만 넣은 거죠. 작은 모터가 바람을 불어넣어서 석탄의 열기를 구들장으로 보내는 식이에요. 그러다 보니 구들장 틈새로 가스가 새어나와 중독 사고가 엄청 많았어요. 저도 처녀 때 용두동 살면서 가스중독을 당해봤어요. 눈떠 보니깐 사람들이 몰려와서 제 입에 동치미 국물을 넣고 있더라고요. 그때는 워낙 그런 일이 많아서 병원은 갈 생각도 못했어요. 어떻게 보면 참 미련하게 산 거죠. 어느날 딸아이가 가스를 맡았다
침 질질 흘리고 입도 돌아갔다
지린 똥 보고 ‘죽진 않겠구나…’ 구공탄이 나오고 나서 가스중독 사고가 빗발치자 ‘새마을보일러’가 나왔어요. 상호 자체가 ‘새마을’이었어요. 그건 연탄으로 물을 끓여서 호스를 통해 방바닥을 덥히는 방식이에요. 새마을보일러를 계기로 구공탄은 사라지고 구멍이 22개 뚫려 있는 무연탄이 자리를 잡았어요. 과거보다는 중독 사고가 훨씬 줄었어요. 그래도 가스중독에서 완전 해방된 건 아니었어요. 가스를 빼내는 굴뚝에 맞바람이 불어서 역류하는 경우가 있었거든요. 큰딸도 가스중독 때문에 병원에 실려간 적이 있어요. 아침에 애가 일어나질 않아서 문을 열었더니, 침을 질질 흘린 채로 쓰러져 있더라고요. 입도 완전 돌아갔고요. 동네 사람들이 업고 뛰어 내려갔어요. 구급차 왜 안 불렀냐고요? 어차피 차도 못 올라오는 곳인데 구급차가 무슨 소용이에요. 당시 마을 밑에 가정의학과가 단 한곳 있었어요. 거기서 겨우 깨어났어요. 가스중독과 관련된 속설이 많아요. 그 가운데 하나가 ‘가스중독된 사람이 똥을 지리면 죽지 않고 깨어난다’는 거였거든요. 그런데 제 딸아이도 보니깐 똥을 지렸더라고요. 살 줄 알았어요. 실려가는 딸아이를 보며, 가난 대물림하는 것도 기가 막힌데, 가스중독까지 대물림하니 억장이 무너지더라고요. 그런데 지금 그 딸아이가 출가했다가 다시 들어왔어요. 결혼생활이 힘들었나봐요. 연탄가스를 맡았던 그 방에 다시 살고 있어요. 문만 열면 바로 보일러가 있어서 또 그런 일을 당하지나 않을지 밤마다 걱정이 태산이에요. 나중에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석유보일러를 깔았어요. 편하긴 하더라고요. 추운 겨울날 새벽, 저녁마다 연탄 가는 건 보통일이 아니거든요. 문제는 돈이었어요. 석유값이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10년 전쯤에 한 드럼(200ℓ)에 16만원 정도 했어요. 그걸 세 드럼을 써야 한겨울을 날 수 있거든요. 그런데 해마다 계속 오르더라고요.(2011년 11월 현재 등유 전국 평균 가격은 한 드럼에 30여만원) 결국 석유보일러를 걷어내고 다시 연탄보일러를 깔았어요.(2011년 현재 무연탄의 장당 공장도 가격은 373.5원이며,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서울시 평균 소매가는 장당 550원이다. 산동네는 최고 650원까지 받는다.) 800장 정도면 겨울을 날 수 있어요. 꺼뜨리지만 않으면 24시간 계속 따뜻하고 장점이 많아요. 꺼져도 요새 번개탄이 좋아서…. 그런데 이곳은 연탄 배달도 안 해줘요. 저기 밑에 있는 도로 끝에다가 연탄을 내려놔요. 그러면 온 식구가 연탄을 나르는 거죠. 배달하려면 품삯을 더 쳐줘야 하고요. 몇해 전부터 각 봉사단체에서 학생들이 나와 해마다 지원을 해주니 그건 편해졌어요. 고맙죠, 뭐. 겨울에는 많이들 찾아오는데, 다른 때는 잘 안 찾아와요. 가난한 것도 서러운데
달동네가 생활비는 더 많이 든다
생활환경 개선이 제일 급하다 못사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인데 생활비는 더 들어요. 하다못해 엘피지가스 한통을 배달시켜도 저 밑에는 3만5천원인데 저희는 4만원을 받아요. 그래야 배달을 해준대요. 하긴 가스통을 지고 이 언덕길을 올라오는 게 보통일은 아니죠. 화장실도 수세식은 엄두도 못 내요. 수세식으로 만들려면 200만원 정도 든다는데, 돈도 없거니와 만들었다가 또 철거당하면 어떡해요. 저기 밖에 보이는 슬레이트 지붕의 벽돌 건물이 화장실이에요. 분뇨처리요? 정화조 차 부르면 돈 들잖아요. 저희가 퍼서 텃밭에 비료로 써요. 저는 연탄값도 아까워서 그냥 전기장판 깔아놓고 살아요. (인터뷰 당시에도 전기장판의 절반만 켜놓고 있는 상태였다.) 연탄값 오르면 어떻게 하냐고요? 나중에 정 힘들면 다시 땔감 써야죠. 평생 그렇게 살았는데, 뭐가 무섭겠어요. 쫓아내지만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일 급한 거요? 사실 화장실이죠.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나무, 기름, 연탄 다 써봤지만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연탄 땐다 1960년대 나온 구공탄(구멍이 19개인 십구공탄을 줄여서 부르던 말)은 혁신이었다. 바싹 말린 나무를 때 구들을 데우는 구식 아궁이는 점점 사라졌다. 하지만 방구들 사이로 스며나오는 구공탄의 일산화탄소는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 뒤로 나온 것이 물을 끓여 순환시키는 ‘새마을보일러’다. 구공탄도 구멍이 22개인 ‘가정용 무연탄 2호’로 바뀌었다. 가스 사고가 현격히 줄긴 했지만 여전히 ‘가스 중독’은 겨울 뉴스의 단골 메뉴였다. 80년대 후반, 등유를 사용하는 기름보일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주부들은 연탄갈이에서 해방되기 시작했다. 현재 도시에선 도시가스가 대세다. 연탄 갈 걱정도 없고, 등유보다 상대적으로 싼 연료 덕분에 시민들의 겨울나기는 과거에 비해 훨씬 편해졌다. 하지만 세계적인 대도시 서울에서 아직까지 연탄을 때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이유는 다양하다. 최근에는 일종의 ‘재테크’로 인식돼 인기를 끌기도 했다. 문제는 연탄 외에는 겨울날 방법이 없는 ‘에너지빈곤층’이다. ‘사랑의 연탄 나눔운동’ 쪽에선 전국적으로 대략 20만가구가 연탄을 사용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가운데 서울에서만 3천여가구가 지원 없이는 연탄조차 땔 수 없는 위급한 상황이라고 한다. 이번 ‘낮은 목소리’는 서울의 대표적 달동네인 상계동 ‘합동마을’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42년째 살고 있는 허영임(가명·68) 할머니를 만나 빈곤층의 겨울나기를 들어봤다. 기사는 인터뷰를 바탕으로 독백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저는 경북 문경 점촌에서 태어났어요. 27살에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공장일을 하면서 용두동·신설동 셋방을 전전하며 살았어요. 남편을 만나고 나서 여기 합동마을로 옮겼어요. 그때 백일도 안 된 큰딸을 업고 오르막길을 올라오면서 ‘이런 산속에 집이 있나?’라고 놀랐던 기억이 나요. 왜 이곳으로 왔냐고요? 이 동네가 원래 더이상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에요. 빈민·철거민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서울의 끝’이에요. 사실 서울이라기보다는 경기도에 더 가깝고요. 산 뒤가 바로 군부대라, 군사보호지역이기도 해요. 처음 도착하고 빈 땅에 말뚝 박고 포장지 둘러서 거처를 마련했어요. 초라했지만, 그래도 편하게 다리 뻗을 공간이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하지만 며칠 뒤 무허가 건축물이라며 구청에서 철거를 하더라고요. 제가 이 합동마을에서 42년째 살고 있는데 36번을 철거당했어요. 거의 1년에 한번꼴로 철거를 당한 거죠.
왜 이곳이 합동마을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산 하나씩을 등지고 사는 상계3·4동(주민들은 삼사동이라고 부름) 일대 산동네를 말하는데, 사람들 말로는 일이 터지면 ‘합동’이 잘 됐다고 해서 합동마을이라고 불렀대요. 철거를 당하면, 다시 슬레이트와 포장지를 사용해 집을 지었죠. 이곳으로 이사온 뒤엔 번듯한 지붕과 벽이 있는 집에서 살아 본 적이 없어요.(지금도 할머니의 집은 회색 슬레이트 지붕과 퍼런 포장지가 전부다.) 그래도 거기서 아이 둘을 더 낳았어요. 살 만하니깐 남편이 세상을 떠나더라고요. 20년 전쯤에 간경화가 갑자기 찾아왔어요. 그 뒤 아파트·병원 등에서 청소일을 하면서 살아왔어요. 지금은 한달에 55만원 정도 받아요. 그래도 일을 계속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허름해 보여도, 이곳이 여름엔 살기 좋아요. 마주보는 수락산 봉우리도 아름답고, 무엇보다 시원해요. 선풍기 없어도 여름을 날 수 있어요. 그런데 겨울이 문제예요. 처음엔 장작을 때면서 살았어요. 산 중턱이라 나무가 많았거든요. 나무를 몇년 때다 보니 구공탄이 나오더라고요. 그때는 지금 연탄보일러하고 달랐어요. 나무를 때는 아궁이에 단지 석탄만 넣은 거죠. 작은 모터가 바람을 불어넣어서 석탄의 열기를 구들장으로 보내는 식이에요. 그러다 보니 구들장 틈새로 가스가 새어나와 중독 사고가 엄청 많았어요. 저도 처녀 때 용두동 살면서 가스중독을 당해봤어요. 눈떠 보니깐 사람들이 몰려와서 제 입에 동치미 국물을 넣고 있더라고요. 그때는 워낙 그런 일이 많아서 병원은 갈 생각도 못했어요. 어떻게 보면 참 미련하게 산 거죠. 어느날 딸아이가 가스를 맡았다
침 질질 흘리고 입도 돌아갔다
지린 똥 보고 ‘죽진 않겠구나…’ 구공탄이 나오고 나서 가스중독 사고가 빗발치자 ‘새마을보일러’가 나왔어요. 상호 자체가 ‘새마을’이었어요. 그건 연탄으로 물을 끓여서 호스를 통해 방바닥을 덥히는 방식이에요. 새마을보일러를 계기로 구공탄은 사라지고 구멍이 22개 뚫려 있는 무연탄이 자리를 잡았어요. 과거보다는 중독 사고가 훨씬 줄었어요. 그래도 가스중독에서 완전 해방된 건 아니었어요. 가스를 빼내는 굴뚝에 맞바람이 불어서 역류하는 경우가 있었거든요. 큰딸도 가스중독 때문에 병원에 실려간 적이 있어요. 아침에 애가 일어나질 않아서 문을 열었더니, 침을 질질 흘린 채로 쓰러져 있더라고요. 입도 완전 돌아갔고요. 동네 사람들이 업고 뛰어 내려갔어요. 구급차 왜 안 불렀냐고요? 어차피 차도 못 올라오는 곳인데 구급차가 무슨 소용이에요. 당시 마을 밑에 가정의학과가 단 한곳 있었어요. 거기서 겨우 깨어났어요. 가스중독과 관련된 속설이 많아요. 그 가운데 하나가 ‘가스중독된 사람이 똥을 지리면 죽지 않고 깨어난다’는 거였거든요. 그런데 제 딸아이도 보니깐 똥을 지렸더라고요. 살 줄 알았어요. 실려가는 딸아이를 보며, 가난 대물림하는 것도 기가 막힌데, 가스중독까지 대물림하니 억장이 무너지더라고요. 그런데 지금 그 딸아이가 출가했다가 다시 들어왔어요. 결혼생활이 힘들었나봐요. 연탄가스를 맡았던 그 방에 다시 살고 있어요. 문만 열면 바로 보일러가 있어서 또 그런 일을 당하지나 않을지 밤마다 걱정이 태산이에요. 나중에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석유보일러를 깔았어요. 편하긴 하더라고요. 추운 겨울날 새벽, 저녁마다 연탄 가는 건 보통일이 아니거든요. 문제는 돈이었어요. 석유값이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10년 전쯤에 한 드럼(200ℓ)에 16만원 정도 했어요. 그걸 세 드럼을 써야 한겨울을 날 수 있거든요. 그런데 해마다 계속 오르더라고요.(2011년 11월 현재 등유 전국 평균 가격은 한 드럼에 30여만원) 결국 석유보일러를 걷어내고 다시 연탄보일러를 깔았어요.(2011년 현재 무연탄의 장당 공장도 가격은 373.5원이며,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서울시 평균 소매가는 장당 550원이다. 산동네는 최고 650원까지 받는다.) 800장 정도면 겨울을 날 수 있어요. 꺼뜨리지만 않으면 24시간 계속 따뜻하고 장점이 많아요. 꺼져도 요새 번개탄이 좋아서…. 그런데 이곳은 연탄 배달도 안 해줘요. 저기 밑에 있는 도로 끝에다가 연탄을 내려놔요. 그러면 온 식구가 연탄을 나르는 거죠. 배달하려면 품삯을 더 쳐줘야 하고요. 몇해 전부터 각 봉사단체에서 학생들이 나와 해마다 지원을 해주니 그건 편해졌어요. 고맙죠, 뭐. 겨울에는 많이들 찾아오는데, 다른 때는 잘 안 찾아와요. 가난한 것도 서러운데
달동네가 생활비는 더 많이 든다
생활환경 개선이 제일 급하다 못사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인데 생활비는 더 들어요. 하다못해 엘피지가스 한통을 배달시켜도 저 밑에는 3만5천원인데 저희는 4만원을 받아요. 그래야 배달을 해준대요. 하긴 가스통을 지고 이 언덕길을 올라오는 게 보통일은 아니죠. 화장실도 수세식은 엄두도 못 내요. 수세식으로 만들려면 200만원 정도 든다는데, 돈도 없거니와 만들었다가 또 철거당하면 어떡해요. 저기 밖에 보이는 슬레이트 지붕의 벽돌 건물이 화장실이에요. 분뇨처리요? 정화조 차 부르면 돈 들잖아요. 저희가 퍼서 텃밭에 비료로 써요. 저는 연탄값도 아까워서 그냥 전기장판 깔아놓고 살아요. (인터뷰 당시에도 전기장판의 절반만 켜놓고 있는 상태였다.) 연탄값 오르면 어떻게 하냐고요? 나중에 정 힘들면 다시 땔감 써야죠. 평생 그렇게 살았는데, 뭐가 무섭겠어요. 쫓아내지만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일 급한 거요? 사실 화장실이죠.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연재낮은 목소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